대구이야기

경상감영 400녕의 도시 대구

이정웅 2010. 1. 7. 19:29

감영400년의 도시
경상감영 설치 후 도심 읍성·도로·관아 대대적 정비
 
 
 
포정동(布政洞)은 경상감영의 정문인 포정문에서 딴 이름이다. 포정문은 경상감영 외삼문 가운데 하나로 2층 누각을 관풍루라고 불렀다. 1906년 읍성이 무너질 당시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겨진 관풍루는 감영과 민가의 경계 위치에서 동서남북 4개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에 풍악을 울리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경상감영은 조선 건국 이후 경주와 상주로 옮겨다니다 1601년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400여년이 흘러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고 일부 건축물만 남았지만 대구의 변화와 발전은 경상감영과 함께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대구 도심의 형태

경상감영은 조선 초 경주에 있다가 세종 때 상주로 옮겨 임진왜란 때까지 유지됐다. 이때까지 감사는 관할 내 읍면을 순시하며 민정을 살피는 일이 주임무였다. 관찰사(觀察使)라고 불린 이유다. 감영이라고 해야 감사가 순찰 중간중간에 머무는 정도의 시설만 있었을 뿐이다. 신구 감사가 교대하는 장소도 감영이 아니라 도의 경계인 조령이었다.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긴 것도 문경새재와 연속됐다는 지리적 여건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임금의 치세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지 위로 올라오는 법은 없다’는 유교적 사상도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으로 지리적`군사적`재정적 측면에서 대구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경상감영은 대구로 옮겨왔다. 감영 설치가 곧 대구의 획기적 발전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100여년 뒤 감영을 중심으로 성곽이 설치되면서 대구의 도시 형태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달성토성이 있긴 했지만 대구는 원래 평야도시였다. 1590년 최초의 대구읍성이 흙으로 세워지지만 2년 뒤 전란으로 단숨에 무너졌기 때문에 도시 구조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성곽으로 형성된 도시와 성곽이 없는 도시는 형태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성곽도시의 경우 시가지 도로가 성문을 통해 외지 도로와 연결되지만 성곽이 없는 도시는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데 장애물이 없다. 개개 건물의 방향과 형태도 성곽의 유무와 큰 관계가 있다.

1736년 관찰사 민응수에 의해 돌로 쌓은 읍성이 만들어졌다. 이를 보면 평야도시로 성장해온 대구에 성곽을 설치함으로써 구조가 흐트러진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시가지의 간선도로가 4대문과 연결돼 있지 않다. 서문과 남문은 성곽 내 중앙까지 간선로와 연결되고 관아에도 닿는다. 그러나 북문과 동문은 성내 중심지와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없다. 민간의 주거와 작은 길들도 평야도시 때의 형태를 금세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경상감사가 대구부사를 겸하고 판관을 두는 제도가 오래 유지되면서 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 건물들이 정돈됨으로써 시가지 정비도 점차 진척을 봤다.

◆감사의 권위

조선시대 감사는 원칙적으로 종2품 이상에게만 제수했다. 고위직 중에서 의정부와 6조, 대간의 추천으로 왕이 임명했으나 임무가 그만큼 막중하다는 뜻이었다. 감사 이하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과 도사, 판관, 중군 등 행정과 사법, 군사 기능을 아우르는 직제가 있었는데 노비와 관기까지 합하면 3천명 가까이 됐다고 하니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감사는 도내 백성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났다. 공납이나 군역 등이 백성들에게 안겨주는 무게가 컸지만 판관을 통해 재판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인 권한이 드러났다. 국가의 법률이 엄하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사실상 감사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도내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은 군수에서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감사의 손에 넘겨졌다.

당시의 재판은 민사`형사를 가리지 않고 피고를 일단 감옥에 가두는 데서 시작했다. 옥살이란 누구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것이어서 부정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재판에 져서 재산을 날리는 일이 허다한데다 체벌까지 받으면 골병들기가 예사여서 뇌물이 횡행하게 마련이었다. 조선 후기 행정이 문란할 때 ‘군수 한번 하면 3대가 호강하고, 감사 한번 하면 8대가 영화를 누린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감사의 재판법이 매우 교활해서 원고와 피고가 서로 싸워 어지간히 지쳤을 때가 돼야 심증으로 판결한다. 원고와 피고가 다투는 방법은 결국 뇌물 경쟁이 되는 것이다. 뇌물 액수가 적은 쪽이 패소하는데다 죄인의 재산이 부족하면 친척 중 재산 가진 자를 연루시키고 죄를 뒤집어씌워 감옥에 넣는다. 뇌물을 써 사람을 빼내고 재판에 진 비용을 감당하느라 한 집안이 파산하는 예가 많았다.’(대구이야기, 매일신문 1991년 8월 23일자)

이러다 보니 부정이 드러나 자리를 잃는 감사가 적지 않았다. 왕권이 안정된 조선 초기나 영`정조 시대에는 임기를 채운 감사들이 많았으나 당쟁이 심하고 기강이 문란했던 시기에는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경상감영 400년사에 따르면 강원도 감사의 경우 1565년에서 1828년까지 266명의 감사 가운데 임기를 채운 이가 39.8%인 106명에 불과한 데 비해 징계가 74명(27.8%), 사직이 51명(19.2%) 등이었다. 경상도라고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경상감영 내 작은 표지들

요즘 경상감영공원을 가면 복원공사가 한창인 감사의 집무시설인 선화당과 처소인 징청각만 눈에 들어오지만 구석구석 흥미 있는 표지들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선화당 앞에 측우기도 없는 측우대가 눈길을 끈다. 감영시절 측우대와 측우기가 있었던 자리에 대리석으로 만든 일종의 기념 표지다. 진짜 측우대는 서울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영조 때인 1770년 전국적으로 측우기가 설치될 때 제작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됐지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공원 입구의 하마비(下馬碑)도 살펴볼 만하다. ‘節度使以下皆下馬’(절도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말에서 내려 들어오라)라고 적힌 비석이다. 하마비는 궁궐과 종묘, 주요 기관 앞에 세워졌으므로 경상감영도 그만한 위상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대구읍성이 무너질 때 향교로 옮겼다가 공원 조성 때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대구의 도로원표도 경상감영공원에서 볼 수 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란 도로의 출발점이나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도시 간 도로 거리의 기준이 되는 지점이다. 대구의 도로원표 지점은 원래 지하철 중앙로역 북쪽 출입구 앞 네거리의 도로 중심인데 도로에 설치할 수 없어 1999년 서쪽으로 215m 떨어진 이곳에 세웠다. 대구원표의 좌표는 동경 128도35분37초, 북위 35도52분09초 지점이다.

징청각 뒤쪽으로 보면 비석이 모여 있는 곳을 볼 수 있는데 관찰사와 판관들의 선정비를 모은 것이다. 1638년 관찰사 이경여를 기려 세운 비석에서부터 1902년 대구군수 김영호의 덕을 칭송하는 비석까지 27기가 모여 있다. 거사비, 선정비, 영세불망비, 애민비, 송덕비, 공덕비, 청덕비 등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뜻을 헤아려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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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1월 0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