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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들어 한반도 대운하에 관한 논의가 중단돼 아쉽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전만해도 환경오염이 우려된다, 국토를 훼손한다 등등 부정 일변도의 보도가 많았다. 그런데 이 대통령 취임 직후에는 언제 그런 보도를 했느냐 의문스러울 정도로 긍정적인 보도가 늘었다. 그러더니 촛불집회 이후에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세상이 달라지기로서니 이렇게 빨리 '안된다' '좋다'에서 다시 '안된다'로 바뀔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운하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본다. 특히 경남 내륙과 대구권의 구미, 고령 등 연안 시●군은 큰 변화를 맞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물류수단으로 수운(水運)을 이용해왔다. 특히 낙동강이 서남부를 에워싸고, 시가지 북단의 동서를 금호강이 흐르고 있는 대구의 도시발달에는 사통팔달 편리한 육운 외에도 수운의 영향이 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많은 시민들이 즐겨찾았던 매운탕의 명소 강창(江倉)은 대구와 인근고을의 조세(租稅)를 저장하던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의 달성군 화원(花園)은 500여년 전 15세기에 우리나라 유일한 대일(對日)국제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구시가 나름대로 한반도 대운하 계획과 연계한 자체 계획을 수립하겠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도 반드시 참고했으면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목 창고 조에 화원의 창고(화원창)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는 인흥사를 빌려서 본현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외국 사신이 가져오는 동·철·소목(蘇木; 약재의 일종) 등 여러가지 물건을 여기에 저장하여 사용하는데 이바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 6월 정해조에 '왜 일행이 바치는 동·철·소목이 거의 3천400태(馬大)에 이르러 농사철에는 그 운반을 위한 농민들의 부담이 크다. 중략…. 왜인이 바치는 물건은 선군(船軍)을 시켜 배에 실어 성주목 화원현에 옮겨 보관했다가 국가에 쓰일 것은 농한기에 서울로 올리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팔도록 하라고 아뢰자 왕이 그러하라 해서 이에 따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화원에 오늘날 조달청 같은 기관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일본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라 하여 이것을 왜물고(倭物庫)라고 했다. 이처럼 내륙에 위치한 화원에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대일 무역창고가 설치된 것은 육운과 수운의 편리성 때문일 것이다. 당시 일본의 대 조선무역은 부산포(동래), 제포(웅천), 염포(울산) 등 3포에서 이뤄졌다. 이곳에 들어오는 일본상품은 모두 국가가 매입해, 양산 동완진(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모아 다시 배에 실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7~8일만에 화원에 닿았다고 전해진다. 수입품은 말·구리·납·철·금·은·백반·감초·장뇌·침향·물소뿔·설탕·상아·향료가 주종이었다. 수출품은 면포·모시·삼베·인삼·꿀·잣·모피 등이었다. 화원창에 수장된 물품은 농한기에 관수품은 서울로 보내졌고, 민수품은 현장에서 매각했다고 한다. 이후 관의 지나친 개입으로 폐단이 발생하자 1485년(성종 16년) 중신들 회의에서 사무역을 허가하게 됐고, 이후 삼포 등지에서 거래가 이뤄지면서 화원창이 문을 닫게 됐고, 무역선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불과 14년여에 걸쳐 성행한 일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15세기 화원은 한때 대일무역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대운하가 불가능하다면, 영남권 발전을 위해 낙동강 운하는 반드시 건설돼야 한다. 이정웅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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