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남인들이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는 내용의 지난번 칼럼에 대하여 여러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렇다면 '안동 김씨'는 무엇이란 말인가?" 안동 김씨 세도로 인해서 안동 또는 경상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안동 김씨는 호적만 '안동'으로 되어 있지, 들어가 보면 이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성씨제도에서, 본관(本貫)과 관향(貫鄕)은 한번 정해지면 그 뒤로 바뀌지 않는다. 본관은 그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장소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경주 김씨'라고 하였을 때, 그 후손들이 모두 경주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전에서 살 수도 있고, 광주에 이주해서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경주'라고 기재한다. 죽음 후 묘비에 새길 때에도 '경주 아무개'라고 새긴다. 그러다 보니 경주에서 계속 살았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안동 김씨도 마찬가지이다. 안동 김씨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청음(靑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걸출한 행적 때문이었다. 이들 형제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사람들이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증조부 때 벼슬을 하면서 안동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서울의 장의동(壯義洞)이 바로 그 근거지였다. 경복궁의 서북쪽 지역인 자하문(紫霞門) 밑의 동네가 '장의동'이다.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 일대이다.
이들 김씨는 '장동 김씨'라고 불렸다. 족보에는 안동 김씨이지만, 실제 거주한 곳은 장동(장의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동 김씨들이 가지고 있던 유명한 저택이 청풍계(淸風溪)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단원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청풍계 전경을 보면 바위 암벽과 소나무, 그리고 우아한 기와집들이 조화를 이룬 서울 최고의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살았던 집이 청풍계 터라고 전해진다. 단단한 화강암을 바닥에 깔고 있어서 기가 아주 강한 집터이다.
안동 김씨 세도는 안동 사람들과 관련이 없다. '장김'은 서울의 노론이었으므로 남인의 도시였던 안동과는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안동은 춥고 배고팠던 '야당도시'였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제 굴이 있는데/ 나 홀로 떠돈 한평생 가슴 아파라
짚신 신고 대지팡이 짚고 천리길 떠돌며/ 물처럼 바람처럼 내 간 곳이 집이었네
(중략)
내 어릴적 안락한 가정서 태어났었고/ 한북(漢北)땅은 내 자란 고향이었지
조상은 벼슬 높았던 사람들이었고/ 영화롭던 장안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이었네.
(중략)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속칭 김삿갓)의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 일부분이다. ‘장안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 이 가문이 조선후기 세도정치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던 장동김씨 가문이다. 이 권력의 근원을 풍수 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점엔 김번 묘가 있다.
학조대사(學祖大師)란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석실마을에 들른다.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다. 지세가 명당이나 주변의 땅이 모두 조카의 처가 소유라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땅이 명당이니 그 곳에 묘를 쓰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에 조카며느리가 친정에 부탁하여 그 땅을 묘터로 허락 받는다. 그런데 그 뒤 처가에서 그 땅이 명당임을 알게 된다. 밤새 물을 퍼부어 물 나는 곳이라 묘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카며느리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양보하지 않는다. 그 뒤 조카와 부인은 그 명당에 함께 묻혔다. 당대 발복 터라 당장 손자대부터 부귀가 잇따랐다. 김번 묘에 전해오는 대강의 얘기다. 세조 때 국사(國師)로 추앙받던 학조대사는 김번의 큰아버지가 된다.
김번 묘의 주위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주산도 높지 않다. 험한 곳이 없다. 탈살(脫殺)이 끝난 부드러운 산세다. 문필봉에 귀봉, 부봉, 일자문성 등이 즐비하다. 그것도 모두가 묘를 향해 배알을 한다. 청룡과 백호는 무조건 혈처(穴處)를 감싸 안아야 한다. 여기에선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청룡과 백호가 정답게 혈처를 보듬고 있다는 얘기다.
주산이 청룡쪽에 있지만 기세는 백호쪽이 강하다. 청룡의 어깨쪽이 약한데다 백호 끝자락이 솟아올랐다. 여기에 횡룡결지의 특징까지 더하면 본손(本孫)보다는 외손(外孫), 장자(長子)보다 차자(次子)가계가 더욱 발달하는 지세다. 앞뒤의 호응도 좋다.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규모의 안산(案山)과 낙산(樂山)이 서로 마주보며 정답다.
김번 묘에 대해선 보국보다 더 널리 알려진 게 형국론적 관점이다. 이른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이다. 술병에 물이 가득 담긴 형태란 의미다. 묘에 올라보면 영락없다. 호리병을 그대로 닮았다. 주룡서 몸을 틀어 묘로 내려오는 내룡이 병의 목, 묘가 있는 넓은 곳이 병의 몸통, 그 아래 잘록한 곳이 손잡이 부분, 도톰하게 솟은 묘 앞부분이 병의 바닥이다.
순전은 혈을 만들고 남은 기운이 나아가 뭉친 곳이다. 따라서 대부분은 묘 위치보다 낮다. 여기선 그게 아니다. 내룡의 강한 기세를 혈장이 모두 거두지 못해 그 힘은 더 나아간다. 거의 내룡의 거리만큼 더 진행한 뒤 혈장과 거의 비등한 규모의 언덕을 만들고 멈췄다. 역기(逆氣)라 봐도 되겠다. 그 아래엔 큼직한 바위들이 마지막으로 기운이 새나감을 막고 있다. 그만큼 지기가 강한 곳이다. 역기는 반골의 기상, 권력을 부른다고 보는 게 풍수시각이다.
한때 이곳은 왕릉 후보자리로 거론됐지만 장동김씨 가문의 힘에 눌려 추진되지 못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장동김씨 가문은 조선시대 부자(父子) 영의정 등 정승 15명, 왕비 3명을 배출했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남양주 김번 묘
玉壺에 담긴 힘이 권력을 일으키다
※김번 묘=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에 있다. 김번(金번 王+番)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 함락으로 순절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과 척화파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형제의 증조부이기도 하며, 이들 형제의 묘소도 부근에 있다. 신안동김씨 중 김번의 직계를 특히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도 하는데, 김상헌이 지금의 서울 효자동 부근인 장동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이들 선조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다. 소산에 있는 김번의 조부 김계권(金係權)의 묘도 명당으로 꼽힌다.
김번 묘. 평탄한 혈장에 밝은 기운이 감돈다. 솟아 오른 묘 앞의 기세로 인해 세도정치가 가능했다고 보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