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우리 모두 자신의 신화를 발굴하자

이정웅 2010. 2. 1. 22:02

] 우리 모두 자신의 신화를 발굴하자
 
 
 
6년 전 나는 개인대학원을 하나 만들었다. 매년 10명 남짓한 연구원들을 뽑는다. 총 2년 과정이다. 학비는 무료다. 첫 일년 동안은 50권의 책을 읽고, 50개의 칼럼을 쓰고, 함께 여행하고, 동료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100개의 코멘트를 듣는다. 그리고 2년차에는 자신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멋진 이야기 하나를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 책이 곧 졸업논문인 셈이다. '나의 이야기의 창조'가 바로 이 대학원의 학습 목표다. 그래서 연구원 모집을 할 때, 첫 번째 선발 기준으로 '개인의 역사 20페이지'를 써서 제출하게 한다. 개인사는 '태몽'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개인 신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왜 하필 태몽일까? 나는 이 아이디어를 삼국유사로부터 얻었다.

삼국유사가 특별히 소중한 이유를 딱 하나만 들어보라면 그 속에 단군신화와 향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건국신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서구 문명의 한 축을 이루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로부터 그 물줄기를 트듯, 우리의 문명 역시 단군신화로부터 발원한다. 나라 하나가 생겨날 때는 건국신화가 있듯, 한 개인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출생신화가 있다. 신화를 황당한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신화는 실제 발생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이다. 나는 그 상징의 해석이 바로 우주적 존재로 태어나는 한 사람의 미래와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태몽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안방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뱀이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수많은 복숭아 중에서 가장 크고 예쁜 복숭아였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배가 황금빛인 찬란한 용이었다 한다. 사람은 특별한 이야기와 함께 세상에 태어나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대부분 한입 거리에 불과한 국화빵이 되어간다. 삶은 평이하고, 어떤 모험도 허용치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간 큰 길, 더 이상 위험이라고는 없는 이미 알려진 평이한 길을 따라간다. 삶은 격정의 물결도 지는 해의 슬픔도 시원한 바람도 푸른 하늘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반복되고 탈색되어 뻔한 인생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안 된다. 우리는 탄생 신화로부터 이어지는 자신만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삶으로 끌어들이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단명하되, 누구에게나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허용된 배역이 있기 때문에 시시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의 상징으로서 태몽이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부모님 중 누구도 내 출생 신화를 낭송해주는 호메로스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신화 없음'이 나의 신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사람'이라는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후 작가가 되었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연스님이고, 호메로스일 수밖에 없는 배역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배역을 읽어 낸 다음의 삶은 흥미진진해졌다. 나는 이 배역을 즐기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낭만주의자가 되자. 낭만주의자는 이야기와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야기처럼 현실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만든 신화에 감동하고 열광하고 의지하여 살아왔다. 이제 자신을 위한 로망 하나를 만들어 주자. 나만의 신화 하나를 발굴하고 창조하자.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자신이 꿈꾼 로망을 스스로에게 계시하자. 우리의 명함에 '최고 로망 창조자'(Chief Roman Creator)라고 적어두자.

우리 모두 이상주의자가 되자. 이상주의자는 이야기를 현실로 구체화하려는 사람이다. 자신의 태몽이나 새로 창조한 신화를 현실로 만들어 내기 위해 새롭게 해석하고, 애쓰다 보면 언젠가 그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살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명함에 '최고 유토피아담당 중역'(Chief Utopia Executive)라고 새겨두자.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찬란한 황금마차가 마른 호박으로 변하듯 꿈이 망상과 환영으로 바뀌지 않도록,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실천하자. 우리의 명함에 '최고 실천책임자'(Chief Did Officer)라고 새겨넣자. 실천이 우리의 유일한 사명이 되듯, 우리의 이마에 땀을 흘리자.

우리 모두 세 개의 명함을 가슴에 품고 살자. 세 개의 역할이 서로 시너지를 만들어 내어 신화 속의 영웅적 삶을 살아 낼 수 있도록 하자. 인류의 시작은 신화였고, 우리의 시작 역시 그렇다. 우리 모두 자신의 신화를 발굴하자. 그리고 그렇게 살자.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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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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