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두류기행록

이정웅 2010. 2. 2. 20:16

저자 김일손(1464~1498)

기행기간 : 1489년 4월 14일~ 28일

옮긴부분 : 16일자 (단속사 관련부분 )

 

(16일, 갑진일)
이틑날 천령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 정도 가서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암천(巖川)의 하류였다. 서쪽으로 푸른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첩첩이 빽빽하게 들어섰는데 모두 두류산의 지봉(支峯)들이었다.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에 이르렀다.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니,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
산음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단성(丹城)에 이르렀는데, 지나온 계곡과 산들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에 서린 여운이다. 신안역(新安驛)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이르러 관에 투숙했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단성의 수령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하게 보내왔다. 화단에 오죽(烏竹) 백 여 그루가 있어, 지팡이로 삼을 만한 것을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었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하고 굽은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는데,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그 들판의 서쪽으로 흘렀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 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어서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의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나아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였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담장의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바로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사명(大鑑師銘)이었다. 완안(完顔)의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거처하는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하였고,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옛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부패하였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하였는데 바로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고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러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서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는데, 덤불 속에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으로 돌의 결이 거칠고 추악하였으며, 그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미치지 못하고, 문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내에 있는 정사(精舍)는 절의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서 그 아래에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는데 이 절의 승려가 수를 놓아 만든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기이한 모양이 각기 달라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절의 옛 문서를 열어보았다. 그 중에 백저(白楮) 세 폭을 연결한 문서이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바로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인데, 바로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의종 부자는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이들이 이처럼 선불(禪佛)에게 삼가하였지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곤욕을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또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 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아서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그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단절된 간찰(簡札)이어서 그 문장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 것으로 절반이 빠져 있었지만,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만한 것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었는데,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있어서 대화할 수 있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의 기업(技業)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고,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먼저 길을 가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나갔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여, 진실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어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비스듬이 가다가 서쪽으로 대략 20리를 지났는데, 모두 두륜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낮았으며 맑은 시내와 흰 돌이 모두 볼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하면서 계곡을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 하였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하여 우러러 하늘을 볼 수 없었고 길은 점점 높아졌다. 6,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었는데, 크기는 백 아람,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는데, 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의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찬술한 것이었다. 절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장대하여 볼만 하였고 방이 매우 많았으며, 깃발은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는데,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 도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날은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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