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손필헌 전 대구문화원 사무국장

이정웅 2010. 5. 2. 15:36

[사람과 歲月] 손필헌 전 대구문화원 사무국장
"일제강점기 끊어진 대구 역사 제대로 이어야죠"
 
 
 
우리에게 일제시대는 암흑에 가깝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당대가 암흑기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당시 역사는 암흑이다. 그 시절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가 드물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역사가 될 ‘오늘’이었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고 기록의 의미도 몰랐다. 그래서 일제시대 35년은 ‘백지’처럼 비어 있다.

손필헌(77)씨는 ‘빈 칸’으로 남은 과거를 추적해 채우는 사람이다. 30여년간 인쇄 사업을 했던 그는 1992년 의학박사 노영하씨와 함께 대구시문화원을 개설했다. 그 뒤 지금까지 모두 4권의 역사 관련 책을 번역하거나 썼다. 두 사람이 대구시 문화원을 설립할 때까지만 해도 전국의 대도시에는 문화원이 없었다. 대도시마다 예술가총연합회(예총)가 있는데 따로 문화원이 필요한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예총은 민간의 전시 무용 공연 등을 활성화하는 단체이고 문화원은 전통 민속 학술 역사 등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단체죠. 그런데 당시까지 정부는 그런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구문화원은 노영하 원장, 손필헌 사무국장 체제로 2003년까지 이어졌고 그 뒤로 후임자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손필헌씨는 물러날 때까지 사무국장으로 실무만 담당했다. 문화원을 연 뒤 그가 한 일은 대구 역사 발굴이었다.

“자료가 없었어요. 지나온 세월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기록은 말간 거죠.”

그는 첫 번째 문화원 사업으로 대구의 비석을 찾아다녔다. 대구 일원의 비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비석에 씌어 있는 글씨를 옮겼다. 비석이 세워지게 된 내력도 파악했다. 많은 비석을 찾아냈는데 대부분 지방 관리들을 위한 송덕비였다. 대구의 동쪽 끝 지역인 숙천에서는 쇠로 만든 비석을 찾아내기도 했다. 밭에 거꾸로 처박혀 있던 쇠비석을 찾아내고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일제는 전쟁하느라 밥숟가락까지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쇠비석이 남아 있었는지 몰라요. 밭에 처박혀 있으니 몰랐나 봅니다.”

그렇게 비석 속 역사를 발굴해 1995년 ‘대구 금석문’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대구문화원의 정신문화 유산 사업의 첫 쾌거였다. 비석을 찾아다니느라 몇 년 동안 발품을 팔았지만 원고료도 촬영비도 없었다.

손필헌씨는 1964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카메라는 귀한 물건이었다. 귀한 물건이라 틈만 나면 카메라를 닦았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카메라의 구석구석을 닦았는데 그 탓에 렌즈에 긁힌 자국이 무수히 생기는 바람에 카메라를 못 쓰게 됐다. 구입한 지 일 년 만에 비싼 카메라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아끼는 마음이 오히려 카메라를 버리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그렇게 배운 카메라는 역사 취재에 큰 도움이 됐다.

‘대구 금석문’ 발간 뒤에는 대구시내 서원과 50년 이상 된 재실을 찾아다니며 거기에 씌어있는 글씨를 베끼고 사진으로 찍었다.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서원과 재실을 찾아다니기 위해 오토바이 한 대를 샀는데 오토바이 탈 줄을 몰라 현재의 영남이공대 운동장에서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서원과 재실은 변두리에 있었고 식당도 없는 마을이라 매일 미국제 레이션을 도시락처럼 사들고 다녔다. 오토바이 사고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펴낸 책이 두 번째 향토 사료집 ‘대구 누정록(樓亭錄)’이다. 한문으로 펴낸 책인데 한글세대를 위한 번역본을 출간할 생각이다.

'대구 금석문', '대구 누정록'을 펴냈지만, 대구 근세사는 여전히 이어지지 않았다. 백방으로 자료를 추적했지만 자료가 없었다. 기껏 찾아낸 자료는 조선 영조 때 발간한 ‘대구읍지’ 정도였다. 일제시대에도 대구읍지가 발간됐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영조때 읍지를 거의 그대로 다시 펴낸 정도에 불과했다.

백방으로 자료를 찾아다니던 중 대구시사 편집실에서‘대구물어’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일제시대 대구에 거주했던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가 쓴 일제시대 대구에 관한 책이었다. 실밥이 해져, 책이라기보다 한 장 한 장 낱장으로 흩어져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는 자료였다. 그 책을 번역하고 현장 자료를 보충해 세 번째 향토 사료집 ‘대구 이야기’를 펴냈다.

‘대구 이야기’는 조선시대 말과 일제시대 초기 대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그러나 ‘대구 이야기’는 개인 가와이 아사오의 시각으로 기록한, 일종의 체험담에 가까웠다. 공식적인 자료로서, 학술적 연구자료로서 가치는 부족했다. 그래서 다시 자료를 찾던 중 1943년 대구부가 발간한 ‘대구부사(大邱府史)’라는 책을 접하게 됐는데, 여기에는 일제시대 대구부에 대한 통계 자료가 풍부했다. 일본어로 된 이 책을 지난 해 12월 우리말로 번역해 ‘대구부사’를 펴냈다. 향토사료 제4집이 탄생한 것이다.

손필헌씨는 끊어진 대구 역사를 잇느라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썼지만 원고료를 따로 받은 적은 없다. 기획비나 취재비, 촬영비도 물론 없었다. 향토사료 제4집 ‘대구부사’를 발행할 때 대구경북연구원으로부터 책 인쇄비를 지원받은 게 전부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거의 평생 대구에서 살았어요. 대구의 과거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손필헌씨는 앞으로 일제시대 일본인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일본 거류민단’에 관한 책을 펴낼 생각이다. 당시 대구 사회의 주류였던 일본 거류민단을 정리할 수 있다면 끊어진 역사의 동아줄을 상당 부분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상당한 자료를 확보한 만큼 조만간 가시적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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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4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