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대표작 흰소,
그의 출세작 '소'는 피란시절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의 권유로 대구에 와서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묵으며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복여관 자리 지금은 헐리고 없다. 이중섭이 묵을 때에는 대구 최고급 여관이었다.
대구시 중구청이 제작해 붙여 놓은 기념표지
수시로 나가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 왼쪽 비바리라는 간판이 출입문이 있던 곳이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꽃자리다방 ( 국제미공사) 표지화를 이중섭이 그렸다.
구상 작 '초토의 시'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이중섭의 출세작 ‘소’의 산실
대구, 향촌동
한국전쟁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엄청난 비극이기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의 많은 젊은이들도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희생되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대구는 달랐다. 전쟁의 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었기에 피란민들로 들끓었다. 그때 정비석, 마해송, 조지훈, 장덕조, 박두진, 이덕진, 방기환, 오상순, 김팔봉, 최정희, 최상득, 전숙히, 최태응, 양명문, 최인욱, 장만영, 김이석, 김윤성, 이상로, 유쥬현, 김종삼, 성기원, 등 문인과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 시대를 풍미하든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내려와 혹은 종군작가로 혹은 피란살이로 어렵게 보냈다.
절망과 허무감은 물론 당장 끼니조차 잇기 힘들 만큼 참담했다. 자칭 국보(國寶)라고 하든 양주동마저도 아내와 함께 손수레를 끌며 굴비장사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예술가들의 창작의욕은 불타올라 조지훈의 첫 시집 ‘풀잎단장’ 김소운의 수필집 ‘목근통신’ 유치환의 시집 ‘보병과 더불어’는 여류작가 전숙희가 운영하던 향촌동의 향수다방에서, 최인욱의 단편집 ‘저류’는 살으리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때 구상(1919~2004)도 첫 시집 ‘구상’과 사회평론집 ‘민주고발’과 전쟁에 짓밟힌 인간성을 증언·고발한 시집 ‘초토의 시’를 간행했다.
화가 이중섭(1916~1956)은 1955년 2월 24일 대구로 왔다. 아내가 왜관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비교적 여유가 있던 구상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당시로서는 최고급이었던 대구역 앞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머물게 했다. 원산 출신의 구상과 평양 출신의 이중섭이 맺은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구상이 원산에서 처녀작 ‘밤’ ‘여명도’ ‘길’로 문단에 데뷔한 동인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이중섭이 그렸다. 이때 이중섭은 같은 곳에서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구상의 시집 <초토의 시> 표지화 역시 이중섭이 그렸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중섭은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작가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무료한 시간을 향촌동의 백록다방에서 양담배 스트라이크의 내지인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구상의 거주지 왜관이나 같은 피란민인 소설가 최태응이 살던 북구 매천동을 오가며 보냈다.
‘흰소’를 비롯해 ‘왜관풍경’ ‘동촌유원지’ ‘왜관성당부근’ ‘구상네가족들’은 이때 그려진 작품들로 보인다.
그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은 대구의 명문여고를 졸업한 미모의 두 재원(才媛)이 개업해 집을 떠나 객지에서 외롭게 보내고 있던 뭇 예술가들의 가슴을 조이게 한 곳이다.
4월 11일에서 16일까지 왜관풍경 등 26점을 출품한 “이중섭전시회”가 영남일보 주최로 미국공보원 [원장 맥타가드(훗날 영남대학교 교수 역임)]에서 열렸다. 스페인의 투우와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내는 그의 독특한 그림은 원장 맥타가드의 관심을 끌어 몇 작품을 구입 해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일로 이중섭 예술의 천재성이 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시 후 이중섭의 정신분열증은 더 악화되었다. 그림을 사 가는 사람들에게 ‘저 친구 멍텅구리다. 내 사기에 속았다’ 하면서 비웃기도 하고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다’고도 하며 거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구상에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큰 차도가 없었다. 그해 여름 8월 26일 마침내 서울로 올라가 치료를 받다가 이듬해 가을 타계했다. 따라서 대구의 많은 사람들은 경복여관을 비롯한 향촌동은 그의 예술의 산실이라고 한다.
특히, 이중섭을 아꼈던 구상은 ‘그는 그림밖에 몰랐다. 때로는 음화(淫畵)를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는 병을 낫게 한다며 천도복숭아를 그려 오기도 했다’고 했다.
이중섭을 대구로 초청하여 대구 예술의 토대를 더욱 풍요롭게 한 구상(具常)의 대표작 ‘초토의 시’는 한국인으로는 몇 안 되게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이중섭이 정열을 불태웠던 경복여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를 끝까지 보살펴주며 전시회를 주선하여 일약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해준 구상도 가고 없으며, 이중섭이 뻔질나게 드나들든 백록다방도 문을 닫고 건물만 휑하니 비어 있다.
전쟁의 포연이 자욱하고 허무와 가난으로 끼니까지 거르기도 했지만 창작열만은 실전 못지않게 치열했던 예술가들로 붐볐던 대구의 향촌동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인근의 장관동 일대에는 소설가 김원일이 피란민과 더불어 보내며 보고 느낀 바를 작품화한 또 다른 전쟁소설 ‘마당 깊은 집’의 무대이다. 따라서 대구 향촌동 일대는 소위 한국전쟁문학(?)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6, 25 당시 종군예술가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일대를 국방부가 전쟁문학 기념사업지구로 지정해 전쟁의 아픔과 그 아픔을 온몸으로 이겨 내려한 종군작가들을 기리고 전후 세대인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이중섭이 제주도에 9개여 월 머문 것을 계기로 서귀포시가 이중섭미술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대구는 그렇지 못했다. 비록 머문 기간이 6개월이라 짧다고할 수 있으나 서울 다음 2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열렸고 특히, 대표작 ‘흰소’가 대구에서 그려지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작품이 국외 알려진 계기가 된 곳이 대구다.
구상 선생에 대한 예우도 그렇다. 그는 프랑스 문부성이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의 한 사람이자 1999년, 2000년 두 해에 걸쳐 작품 ‘초토의 시’가 노벨문학상 본상에 올랐던 시인이다.
칠곡군이 ‘구상문학관’을 지었고, 그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영등포구청이 문학상으로는 드물게 거금의 시상금으로 해마다 유능한 작가에게 주는 구상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에 본심에 올랐던 작품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꽃자리다방이 있는 건물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관리되고 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대구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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