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우계인 이수형선생과 봉화 도촌리 회화나무

이정웅 2010. 5. 15. 06:42

 

 

 도촌 이수형선생이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  봉화로 낙향하여 21세 때 심은 회화나무,  지금의 나무는 한국동란 당시 고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도촌 선생이 영월에 있는 단종을 사모하며 북쪽으로 문을 내고 일생을 보낸  공북헌

 

 공북헌(拱北軒) 은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경모했다는 뜻으로 눌은 이광정이 지은 것이다.

 

 우계인 도촌선생 종가

 

 1610년(광해 2) 사림이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계서원, 금성대군 이유, 순흥부사, 이보흠, 취사 이여빈이 배향되었다.

 

도촌 이수형 선생과 죽었다가 200여 년 후에 되살아난 봉화 도촌리 회화나무

 

 

 

두류도서관에 갔다가 괴단광감록(槐壇曠感錄, 1993, 대보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목의 분류체계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던 옛날에는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한자로 괴목(槐木)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책의 제목을 볼 때 느티나무나 회화나무에 관한 이야기려니 하고 살펴보았더니 예상은 적중했다. 우계인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과 신이(神異)한 회화나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도촌은 1435(세종 17)에 태어났다. 수양이 대군 시절 가깝게 지냈으며 약관 17세에 음보(蔭補)로 관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분노한 나머지 치악산으로 들어가 생육신인 원호, 조려와 함께 시국을 논하고는 곧이어 평시서령(平市署令, 시장에서 쓰는 자, , 저울 따위와 물건값을 검사하는 기관)을 사직하고 궁벽한 시골 봉화로 내려와 회화나무를 심고 북쪽으로 문을 낸 집 공북헌(拱北軒,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37)을 짓고 단종이 유배된 영월을 두 손을 맞잡고 바라보며 사모하다 1538(중종 33) 94세로 돌아가시니 이때 도촌이 심은 회화나무도 따라 죽었다.

그가 은둔한 봉화는 처가가 있는 곳이다. 장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1416~1464)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뛰어난 천문학자이기도 하다. 1610(광해 2) 사림에서 공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웠으며 1791(정조 15) 인근 순흥부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李甫欽)을 함께 배향했더니 희한하게도 죽었던 회화나무가 253년 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이 신이(神異)한 나무를 보고 무려 111명의 선비가 시문을 남겨 후손들이 이를 모아 책 괴단광감록을 엮었다. 이 책에는 필자의 방계(傍系) 선조로 고종 때 공조판서를 역임한 이원조(李源祚)의 작품도 있었다. 강릉 부사 시절 이 고을을 지나칠 때 쓴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다. 우계이씨 종친회를 검색했더니 공교롭게도 후손 봉성씨가 검단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114에 번호를 확인하였더니 요행이 통화가 되었다. 도촌 선생과 다시 살아난 회화나무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 영주의 이갑선씨를 소개해 주어 이 선생께서 도촌선생실기괴단광감록한 질을 보내주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일만 남았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직장에 매인 몸이라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홍성천 박사를 만났더니 5월 중 어느 날 봉화 갈 일이 있다고 했다. 동행을 부탁했더니 이외로 빨리 날짜가 결정되었다.

좀 당황스러웠다. 기온이 유난히 낮았던 그해 봄. 그렇지 않아도 다른 나무보다 잎이 늦게 나오는 것이 회화나무인데 가지만 앙상해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무의 특징을 파악하려면 개화기가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잎이 달였을 때가 그나마 좋은데 대구보다 훨씬 북쪽이고 특히, 춘양 비롯한 봉화는 한반도의 시베리아로 알려진 곳이라 대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 교수는 우리나라 수목학계의 대부이자 경상북도 식물 분야 문화재 위원을 역임하였으니 필요하면 이 나무를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동행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를 제출하고 봉화로 향했다. 출발하면서 갑선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곳에 가는 길이라 동행할 수 없어 미안하다며 종손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으나 불통이었다.

일단 현장으로 갔다. 국도변에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나무는 작았다. 일족인 이장(里長) 말에 의하면 한국동란 때도 고사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나무는 수령이 7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촌이 21세 때에 낙향하여 심었다고 하니 전체적으로는 수령이 500여 년이 넘는다. 더욱이 문헌에 나무의 이력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문화재로 지정하는데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홍 교수도 동감했다. 죽어서 되살아났다는 것은 맹아(萌芽)가 나서 다시 자랐다는 것이니 본래의 유전자는 그대로 수맥에 녹아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수령은 심을 때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남지방에는 시문을 남긴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산청의 정당매”, 안동 경류정의 뚝향나무가 그것들이다. 노거수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에는 현존의 실물 크기도 중요 하지만 문헌상 심은 연도와 심은 이의 인격, 사회에 끼친 영향 등 인문학적인 요소도 참고 되어야 한다. 특히 도촌은 비록 생육신은 아니 지만 그들과 함께 세조의 단종 폐위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며 영월만 바라보다가 죽은 분이다. 그가 수식한 괴목(槐木)은 그의 충절을 닮아 죽고 살기를 반복했다. 지역의 문화자원을 하나라도 더 발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봉화군은 이 나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