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창원인 황전선생과 영주 병산리 갈참나무

이정웅 2010. 5. 17. 05:29

 

 1426년(세종8) 통례원 봉례로 있던 황전선생이 낙향하여 심은 갈참나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생육상태가 양호히다 (천연기념물 제285호)

 

 갈참나무의 잎

 

 참나무의 종류와 특징

 

 황전선생이 낙향하여 지방의 유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첨모당(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15호)

 

 황전을 제향하는 숭보사

 

 숭보사앞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화나무(보호수)

 

창원인 황전선생과 영주 병산리 갈참나무

 

 

 

각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짧지만 기억하기 쉬운 특징적인 구호를 내걸고 있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영주는 선비의 고장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퇴계를 비롯한 많은 성리학자를 배출하여 한국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어지는 안동을 제쳐두고 영주가 선비의 고장을 표방한 데 대해서는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꼼꼼히 챙겨보았더니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분이 영주 출신의 안향(安珦) 선생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소수서원(사적 제55)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사액서원이며 이는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대학(1636)보다 무려 93년 앞서 건립된 이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두 가지 점만 보아도 영주가 선비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오늘날의 영주시는 조선 조 초()까지만 해도 영천군(榮川郡)과 풍기군(豊基郡) 순흥도호부 3개의 독립된 행정기관이었다. 그러나 1457(세조 3)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부역(府域)의 일부가 영주와 봉화, 풍기로 나누어지는 폐부(廢府)의 운명을 맞았다. 따라서 1683(숙종 9) 주민들의 상소로 다시 부()로 복귀되기까지 226년 순흥은 반란의 땅이자 버림받는(?) 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주민들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영천군),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경상(耕桑)을 즐겨한다.(풍기군)”이라고 하였다. 영주에 대한 이러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단산면 병산리를 찾았다. 그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갈참나무가 천연기념물(285)로 지정된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갈참나무는 참나무과의 한 종류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두고 다수의 사람은 그냥 참나무라고 부르나 학문상에 참나무는 없다. 통칭 참나무로 불리는 나무에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등 모두 6종류가 있다.

병산의 갈참나무는 황전(黃纏), 1391~1458)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1357(공민왕 6) 본관지 창원에서 단산 병산리에 터를 잡은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황승후(黃承厚)의 손자다. 아버지 황처중(黃處中)은 영일 감무(監務)를 지냈다.

1426(세종 8) 조회와 의식(儀式)을 담당하는 통례원(通禮院)의 봉례(奉禮)를 지내던 그가 낙향하면서 심었다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의 일이다. 1429(세종 11) 첨모당(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15)을 지어 지방의 유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1456(세조 2) 순흥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금성대군 유()가 남손(南遜)이라는 사람을 보내 쌀 포대 속에 은괴(銀塊)를 몰래 가지고 와서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병이 들어 걸을 수가 없다며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일찍이 서로 교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위도 다르니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하면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단종 복위운동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금성대군은 물론 지역의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그은 무사할 수 있었다.

1535(중종 30) 증손 황사우(黃士祐)가 나라에 크게 공헌함으로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1735(영조 11)에는 병산리 숭보사(崇報祠)에 제향 되었다.

예 사람들의 수식목(手植木)을 살펴보면 대체로 3가지 유형이다. 회화나무나 은행나무 등은 유학 관련된 의미를 부여하여 후손 중 학자나 벼슬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염원하는 뜻이고, 탱자나무나 조각자나무 등은 약효가 뛰어난 나무를 심어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심고, 호랑가시나무나 느티나무 등은 거처하는 곳의 풍수적인 결함을 비보(裨補) 하기 위하여 심은 경우이다.

황전 선생은 이도 저도 아닌 갈참나무를 심어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여 동행한 홍성천 교수에게 물었더니 수리(水利)시설이 발달하지 아니하였던 옛날은 흉년이 잦았으니 그때를 대비해 구황(救荒)의 의미로 택목을 한 것이 아닌가 했다. 저물녘에 도착한 병산리는 마을 앞에 내가 있어 논농사를 짓기에 수월했을 것 같다. 수령(樹齡)에 비해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아직도 동제를 지내는지 금줄이 쳐져 있었다.

숭보사(崇報祠) 앞에는 500년이나 되었다는 큰 회화나무가 안에는 250년 향나무가 서 있고 도랑 건너 인근에는 이끼긴 골기와 집의 고가 첨모정이 퇴락해 가고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문화재 안내판에 영풍 병산리 갈참나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한때 영풍군 시절 명명된 것으로 보이나 이제는 영주 병산리 갈참나무로 바꿔야 한다. 소소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소한 것이 쌓이고 쌓여 국내에서는 유일한 갈참나무 천연기념물을 보유한 영주의 가치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