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충신 문극겸과 나주 산포면 도민마을 감나무

이정웅 2010. 5. 26. 16:18

 

 고려 중기 충신 문극겸(1122~1189)이 심었다는 수령 800 여 년의 감나무 나주혁신공단지역에

편입되어 보존 여부가 불분명한 것 같다.

 

 

문극겸선생의 영정

 

 뿌리

 커다란 동공이 있는 줄기 태풍이라도 불면 부러질 것 같아 안타깝다.

 그나마 문중의 노력으로 보존된 것 같다. 문중의 노력이전에 당국이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깎끼고 헐린 나주혁신공단 예정지

 충숙공 문극겸이 태어난 나주시 산포면 도민 마을  마을이 헐리고 정자만 우두커니 남아 있다.

 

충신 문극겸과 나주 산포면 도민마을 감나무

 

 

늦은 봄이지만 여름처럼 무더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나주시 산포면 도민 마을을 찾았다. 2003년 모 방송국의 히트작 ‘무인시대(?)’를 시청하면서 비록 지존(至尊)이라도 바른 말을 굽히지 않던 충신 충숙공 문극겸(文克謙, 1122~1189) 선생이 심은 감나무나무 (보호수 15-4-11-3)를 보러 가는 마음은 흥분마저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공은 1122년(예종 17)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문공유(文公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 아버지 문공인(文公仁)의 음보(蔭補)로 출사해 의종(毅宗, 재위, 1146~70)때 급제했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왕의 신임을 빙자하여 국정을 문란하게 하고 궁녀 무비와 놀아난 내시 백선연과 미신으로 왕을 유혹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돈을 모은 점쟁이 영의와 탐관오리 최유칭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황주 판관으로 좌천되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공의 선정으로 고을 주민들의 칭송이 온 고을에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훌륭한 평판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어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는 잘 못을 과장해서 보고해 파면을 요구했다. 왕 역시 전날 그가 올린 상소가 못 마땅하여 다시 진주 판관으로 좌천 시키려했다. 이 때 바른 말 하는 신하를 외직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해 합문지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했다.

1170년(명종 4) 정중부가 난을 일으켰을 때 숙직을 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그의 높은 명성이 알려져 무사할 수 있었다. 의종이 거제도로 떠나면서 ‘문극겸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명종(재위,1170~97)이 군부에 의해 추대되고, 이의방의 천거로 우승선(右承宣)과 어사중승(御史中承)에 임명되었다. 이후 날로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과 상장군을 겸직하여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이를 두고 좌간의(左諫議) 김신윤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됨은 부당하다 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중에 태부소경(太府少卿)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지원사(知院事)로 있을 때 송유인의 시기하여 수사공 죄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좌천 되자 봉급을 받지 아니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1181년(명종 11) 관등순위 제 2위인 판례부사를 제수 받고 이듬 해 중서문하 두 성(省)과 판병부사 겸하고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로 있다가 1189년(명종 19)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왕이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고 인자하고 충직하였으며 바른 말을 잘 하고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공이 태어난 도민 마을은 곧 사라질 처지에 있었다. 일대가 나주혁신공단에 편입되어 철거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평소 홀대하든 많은 문신들을 죽일 때 공만이 온전하여 문신(文臣)의 자존심을 지킨 훌륭한 분이 태어난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이 심었다는 감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800여 년의 수령이라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을 터인데 마을 안은 온통 너절한 쓰레기뿐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텅 빈 마을이자 낯선 곳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정지작업으로 깎기고 헐린 등성이로 갔다. 맨 갓 쪽 경사진 부근에 다소 커 보이는 나무가 있어 가 보았더니 줄기에 ‘본 수목은 남평 문씨 문중 족보에 등재된 의미 있는 감나무로 별도 처리 전까지 벌목 금지, 전남개발공사 혁신도시사업단’이라고 쓴 종이가 흉터처럼 붙여져 있었다.

공의 수식목이 바로 이 나무이겠구나 하면서 사진에 담았다. 나중에 김씨라는 분을 만나 물어보았더니 맞다고 했다. 현직에 있을 때 도시개발관련 팀과 싸우던 생각이 났다. 개발 예정지내에는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으로 조성된 좋은 녹지가 있을 때가 있다. 공사를 진행하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 보존하면 좋을 터인데도 뭉개고 난 뒤 새로 녹지를 조성하려고 해 잦은 다툼이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공단 내에는 법적으로 일정면적의 공원과 녹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나무를 베 내지 말고 어차피 만들 녹지에 포함시키면 경비도 절감되고 주민들의 애환이 살아 숨 쉬든 곳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곳 상황 역시 그렇지 못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포클레인이 한 바가지만 더 긁었어도 800년을 버텨온 유서 깊은 나무가 폐목이 될 번했었는데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찔한 현장이었다. 문제는 문중이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하루 빨리해 공단과 협의해 현지에 보전하도록 하되 정 그럴 여건이 아니라면 다소 모험을 하드라도 이식(移植)해야 한다.

각 자치단체가 지역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 내는데 한 시대를 대표했던 지역이 배출한 훌륭한 충신의 유적을 내팽개치다시피 하는 나주시의 처사가 못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