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 경 제주 양씨들이 심었다는 수령 400여 년의 무환자나무
나무의 줄기
조선전기 시서화에 능했던 제주 양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학포 양팽손의 부조묘
그들의 본향이 제주임을 강조한 탐라고가 현판
달아실 마을 입구
혜강공 양팽손 선생과 화순 달아실 무환자나무
해마다 식목일을 전 후해 산림청이나 지자체는 ‘나무나누어주기’ 행사를 벌인다.
주로 산에 심을 나무는 산림청이, 정원이나 아파트에 심을 조경수는 지자체가 그 기관의 처한 입장에 따라 유형이 다른 나무를 나누어 준다. 시민들의 반응은 좋다. 나무에 대한 인식에 높아진 탓과 무료라는 점도 매력을 끄는 것 같다.
행사를 하는 며칠간은 줄을 길게 설 정도로 많이 참여하지만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아파트는 이미 건축할 때 심은 나무들이 많고, 정작 필요로 한 곳인 단독 주택은 공간이 좁아 시정부가 목표로 하는 숲이 우거진 녹색 도시 만들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구상했던 프로그램이 시민들이 좋아하면서도 장차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를 보급하는 일이었다. 이 때 채택했던 나무가 엄나무와 무환자나무였다.
엄나무는 줄기에 가시가 돋는 특징이 있어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대문 쪽에 심으면 잡귀(雜鬼)가 들어오지 않는 다하였고, 무환자(無患者)나무는 이름이 시사하듯 집안 우환(憂患)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있는 신성한 나무들이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의미 있는 나무를 심으면 일부러 부탁을 하지 않아도 잘 가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나무 모두 이런 장점이 있는 반면에 2년 만에 발아(發芽)하여 대량 번식에 시간이 걸리고 특히 온대지역인 대구지방에서는 무환자나무의 씨를 구할 수 있을 만큼 큰 모수(母樹)가 없었다.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여주이씨 집성촌인 삼은정에 노거수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화순군이 학포 선생의 부조묘가 있는 뒷산의 큰 무환자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1580년 경 제주 양씨 집안에서 심었다고 한다. 제주가 본향인 그들이 화순 도곡면 월곡리 달아실 마을에 정착한 것은 나주에 살던 양담(梁湛, 1430~1495)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제주 양문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호남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는데 가장 돋보이는 분이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다.
공은 아버지 양이하(梁以河, 1455~1525)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 태어났다. 13살 때 송순, 나세찬 등과 함께 송흠(宋欽, 1459~1547)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워 1510년(중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같이 합격한 사람 중 한 분이 개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였으며, 그와의 만남은 학포의 일생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29세 때인 1516년(중종 16)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또한 현량과에도 합격했다.
이후 정언, 전랑, 수찬, 교리 등 주로 청환직에 근무했으며 유능한 관리에게 주어지는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을 누렸다. 정언으로 재직 시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을 대신들이 못마땅하게 여겨 체직을 되기도 했으나 명받았지만 김정 등 신진사류들로부터 올곧게 언로 유지한 인물로 평가 받았다.
이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파직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중조산 아래 학포당을 지어 독서로 소일했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이 기준, 박세희, 최산두 등 이른 바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다.
때마침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를 오니 그와 더불어 매일 학문을 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해 두었다가 그의 고향 용인에 안장토록 했다.
1539년(중종 34) 다시 관직이 제수 되었으나 사양했다. 1544년(중종 39) 김안로가 사사되자 용담현령에 잠시 나갔다가 곧 사임했다. 이듬 해 1545년(인조 1) 58세로 돌아가셨다.
1630년(인조 8)김장생의 청으로 능주의 죽수서원에 배향되고,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에 추향되었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학포유집>이 있다.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고 특히 남종화를 잘 그려 윤두서, 허련이 그의 맥을 이었다. 작품 <산수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 아들 응태와 응정 모두 대과에 급제했으며 특히 응정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스승이다. 이들 이외에도 후손들 중에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로 등록된 무환자나무는 제주도에 단 1그루 밖에 없다. 따라서 명문의 혼이 깃든 수령 400여 년의 이 나무도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 길이 없어 접근하기가 불편한 점 이외 현장 여건이나 생육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그러나 귀중한 자연유산에 대하여 당국과 문중 모두 소홀히 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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