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5대왕 문종이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손수심고 가꾸었다는 앵두나무
빠알갛게 익어가는 앵두
후원에 있는 우물
꽃담과 화계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효심과
경복궁 후원의 앵두나무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2001, 눌와>는 우리나무 문화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주변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일일이 조사해 우리나라 왕실조경에 사용했던 나무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필자에게 눈길을 끄는 곳은 경복궁이다. 임란 때 불타고 고종 때 새로 짓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궐이기 때문이다. 특히, 왕후의 거처인 교태전 뒤에 조성한 아미산의 꽃담과 화계(花階), 수목 등은 조선시대 조경기법이 잘 보존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나무 중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는 나무는 앵두나무다. <궁궐····>에 의하면 경복궁에는 서어나무, 자귀나무, 배롱나무, 산수유, 화살나무, 왕버들, 버드나무, 능수버들, 뽕나무, 앵두나무, 말채나무, 살구나무, 돌배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사철나무, 불두화, 시무나무, 오리나무, 주엽나무, 전나무, 팽나무, 개나리, 가죽나무, 자작나무, 개오동나무, 모감주나무, 측백나무, 음나무, 쉬나무, 대추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모두 37종이 심어져 있다.
대부분 우리니라 자생종이고 일부는 중국 원산이나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심어온 나무들이다. 따라서 최근 고택, 서원, 재사 등 전통건물을 지으면서 외래수종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고 있는 식재 기법은 국적을 잃은 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복궁 내의 수목은 우리 전통조경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화계에 앵두나무가 심어진데 대해서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성군 세종(世宗, 1397~1450)은 앵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특별한 약효가 있어서였던지 아니면 새콤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과일을 쉽게 먹을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왕이라 해도 그 호사는 오늘날 서민만도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효심이 지극했던 문종은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대궐 내 곳곳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 가꾸었다고 한다.
조선 제5대 문종(재위, 1450~1452)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어 1451년 37세 때 세종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건강 역시 좋지 않아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성질이 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그는 치세 기간은 비록 2년 3개원에 불과했으나, 아버지 세종이 건강이 좋지 않아 8년간 대리청정하면서 주요 국정을 수행했었기 때문에 세종 말년의 치적은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재임 중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간행하고 <동국병감>을 정비하여 군사정책을 강화하였으며 변방을 굳건하게 지켜 평화를 유지 시켰으나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가장 지근에서 건강을 돌봐 주어야할 첫 번째 부인은 지나친 질투로, 두 번째 부인은 몸종과의 동성연애로 각기 쫓겨나고 세 번째 현덕왕후를 맞아 비로소 안정을 찾으며 사이에 단종을 두었다.
이런 효심이 서려 있는 앵두나무를 꽃이 필 때 꼭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우연하게 서울 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 짬을 이용해 가보기로 했다. 빨라진 고속철은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그날따라 전통적인 복장을 한 수문병(守門兵)들의 교대식이 재현되고 있었다.
광장에 우뚝 선 근정전의 위용이 시골에서 온 방문객을 압도했다. 남쪽은 확 트이고 동, 서, 북쪽으로는 북악산, 인왕산, 낙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아 그런지 인구 1,000만이 살고 있는 서울 같지 않게 조용했다.
관광 온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들로 붐볐다. 경회루는 서쪽에 있었다. 앵두나무 있는 곳이 <궁궐-->에 그려져 있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일하는 사람이 가르쳐 준 작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니 함지원이고 뒤뜰 우물가에 앵두나무가 있었다.
길게는 600여 년 전 문종이, 짧게는 150여 년 전 대원군이 중건할 때 심었다고 해도 너무 작아보였다. 나무 옆에 샘이 있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의 풍경이 시골마을이 아니라, 고대광실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퍽 재미있었다.
꽃은 지고 앵두가 익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무가 작은 것이 실망스러웠으나 이 앵두 역시 문종이 심은 나무의 맹아(萌芽)가 이어져 살아오고 있는 수식목(手植木)이라고 믿으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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