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풍인 곽여량(1602~1680)님이 심은 삼정자목 3그루가 마치 1그루 처럼보인다.
쉬원하고 넓은 그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간다.
대구에서 가장 큰 저수지 달창지
충렬공 곽준과 충익공 곽재우를 기리는 예연서원
현풍곽문의 자랑 십이정려각
현풍인 곽여량과 달성군 한정리 삼정자나무
달성군 유가면 한정리 마을 입구에는 소위 ‘삼정자목(三亭子木)’이 있다.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亭子)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느티나무를 일러 '늦게 티'를 내며 자라는데서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스스로 맵시를 내면서 자라기 때문에 늙은 나무일수록 더 아름답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겨울철 무수히 뻗은 가지들의 환상적인 모습이 여인의 나체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다.
나무의 세계도 다른 생물계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자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이 유지되면 경쟁을 멈추고 한 쪽 공간을 서로 양보하면서 자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들보다 더 현명하게 살아간다.
느티나무는 이런 성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무다. 이런 점에서 삼정자나무는 모범생(?)이다.
대구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달창지로 가는 길목이자 정유재란 시 함양의 황석산성을 방어하다가 본인은 물론 두 아들과 며느리까지 순절하여 ‘일문삼강(一門三綱)’으로 추앙받는 충렬공 곽준(1550~1597)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충익공 곽재우( 1552~1617)의 위패를 모신 예연서원(禮淵書院)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차천(車川)이 바로 옆을 흐른다. 삼정자목은 많은 길손들의 사랑을 받는다. 수관 폭이 워낙 커서 큰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기 일수다.
대구시 보호수이기도한 이 나무는 400여 년 전 곽여량(郭汝樑)이라는 분이 심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주는 이 나무에 대해, 심은 이가 언제 태어났는지? 생전에 무슨 일을 하신 분인지? 무슨 동기로 나무를 심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했다.
도서관에 가서 족보를 검색했다. 여(汝)자 항렬이 20세(世)라는 것 이외 특별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현풍 곽 씨 대종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물었더니 고맙게도 곧바로 답신이 왔다.
본손(本孫)이지만 여량(汝樑)선조가 삼정자목을 심은 것을 몰랐으며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공의 증조부는 곽월(郭越, 1518~1586), 할아버지는 곽재록(郭再錄)이고, 아버지는 곽례(郭澧)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분이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증조(曾祖) 곽월은 슬하에 5형제를 두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분이 임란 시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가는 곳마다 승리로 이끈 셋 째 아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다.
공은 1602년(선조 35)에 태어났으며 부인이 성산 이 씨이고, 외아들 섬(暹)을 두었으며 1680년(숙종 6) 79세로 생을 마감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학문을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평범한 중에 비범함이 있었으니 삼정자목을 남긴 일이다.
‘가지 줄기를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 사람들도 찾아와 쉬며 놀지요.’ 라는 노산의 시 ‘나무의 마음’과 같이 허허 벌판에 가지를 넓게 뻗어 그가 부자이던 가난한 농부이던 모두 다 품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문집을 남겨 몇 줄의 현란한 글로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것보다 더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현풍 곽 씨는 명문이다. 본향 행정구역 명칭 현풍면 대리(大里)보다 ,예(禮)를 따른 따른다는 솔례(率禮)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어느 문중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십이정려각(十二旌閭閣, 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29호)이 우뚝 서있다.
충효가 가장 큰 덕목이었던 시대 충신 1, 효자 9, 열녀 6 등 모두 16분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유적을 한 곳에 모아 기리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현풍 곽씨들이 자랑해야 할 또 다른 느티나무로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수령 520여 년의 현고수(懸鼓樹, 쳔연기념물 제493호)가 있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망우당이 북을 매달고 두드려 의병을 모았다는 나무다.
조선조 이왕가의 문장(紋章)을 오얏나무 꽃으로 했고, 캐나다는 사탕나무단풍을, 레바논은 히말리야시다를 각기 그 나라 국기(國旗)에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역사성이 있는 나무를 문중의 상징나무로 지정하여 재실이나 사당 주변에 많이 심어 다른 문중과 조경을 차별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현풍 곽씨는 느티나무가 제격이라고 할 수 있다.
(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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