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광양현감 최수학과 옻골 마을의 회화나무

이정웅 2010. 6. 27. 16:13

 

옻골 마을 한 복판에 서 있는 광양현감을 지낸 최수학이 심은 회화나무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흔히 백불고택으로 불린다. 

마을 뒷쪽에 있는 대암산, 바위가 살아있는 거북과 같아 생구암으로 부른다. 

최수학 선생의 무과급제 교지

 

마을의 좋은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밖의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한 느티나무 비보림 

 

 

대구의 동북쪽 둔산동에 위치한 옻골 마을은 대암산을 뒤로하고 동쪽으로는 검덕산이, 서쪽으로는 서산이 감싸 안고 남쪽은 확 트여 농경지가 전개되다가 금호강으로 이어지는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집성촌이다.

인조 대의 문신(文臣)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 1586-1661년)선생이 1616년(광해군 8)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아직 혈기왕성한 31세였다. 그는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그러하듯 대구에 문풍을 진작시킨 한강 정구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생원이 되고, 이어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만큼 엘리트였다. 그러나 동급생인 이이첨(李爾瞻, 대북파의 우두머리로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를 유폐(幽閉)시켜 인조반정 때 참형된 사람)이 사귀자고 요청하자 그가 장차 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거절하며 낙향했다고 한다.

1639년(인조 17)에 유일로 천거되어 능참봉이 되고, 이듬해 봉림대군(나중에 조선 제17대 효종이 됨)의 스승으로 제수된 분이다.

대국 명(明)이 망하자 팔공산 자락 부인동(현 용수동 일대)에 터를 잡고 숭청처사(崇禎處士)를 자칭하며 외부와 단절한 채 오로지 글 읽기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용수동 냇가의 큰 자연석 비에는 영·정 시대 명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찬한 비문이 전해오고 있으며 저서로 <대암집>을 남겼다.

옻골 마을 한 복판에 학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2그루를 심고, 입구에 못을 파서 뒷산 즉 대암산의 생구암(살아있다고 여기는 거북모양의 바위)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밖의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느티나무를 ,서쪽의 허한 부분에 소나무로 비보 숲을 조성한 것은 광양현감을 지낸 최수학(1652~1714)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691년(숙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절충장군 부호군을 역임하고 광양현감에 제수되었다. 재임 시 선정을 펼쳐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가 있다.

특히 퇴계학파의 거두로 남인을 대표하는 갈암 이현일(1627~1704)이 서인 안세징의 탄핵으로 종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7년( 숙종 23)광양으로 이배되어 귀양살이를 할 때 잘 보살펴드려 본인은 물론 아들 이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한 연회장에서 이조(吏曹, 관리들의 승진과 전보 등 인사를 총괄하는 부서 )의 모 벼슬아치가 분에 넘치는 무례한 행동을 하자 그를 크게 나무라고는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분이다.

옻골은 이런 선조들의 바람이 헛되지 않아 당대 유림의 종사로 존경받는 백불암 최흥원을 비롯하여 영하3걸(嶺下三傑)의 한 분인 최식, 성리학자 최효술,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백불암(1705~1786)은 퇴계 이황(1501~1570년)이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해 만든 예안향약을 보다 현실에 맞도록 증보(增補)하여 대암이 은거하던 부인동에 동약(夫人洞 洞約)을 실시하여 주민들의 생활안정과 풍속순화에 많은 노력을 기우렸으며, 정조가 문효 세자의 스승으로 전국에 어진 선비를 구할 때 좌익찬(左翼贊)에 천거되어 우익찬 순암 안정복과 인연을 맺어 사후 그가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명을 받아 보본당에서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 초고를 교정했다. 사후(死後)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고 저서로 <백불암집>을 남겼다.

1630년(인조 8)년에 지은 종택은 대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흔히 백불고택(百弗古宅)으로 불린다. 오른 쪽에 1742년(영조 18)에 지은 재실 보본당, 대암의 불천위 사당인 별묘(別廟)와 백불암 최흥원(1705-1786년)의 불천위(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로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사당인 가묘(家廟)가 있다.

안채, 사랑채, 재실, 가묘, 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로 특히 주택은 중국 명나라 건축양식으로 원, 사각, 팔각기둥을 배합하여 주역의 원리를 적용한 특이한 구조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양반 주택과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2009년,6월 18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승격되었다.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낮으면서도 소박한 돌담, 전통건축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이다. 이곳에 정착하기 이전에도 지역에서 많은 활약을 했는데 임란 시 의병으로 참가해 공을 세운 최계, 최인 형제와 조카 최동보는 이른바 “최씨3충(崔氏三忠)”이라 하여 향내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대암의 아버지인 최계(1567-1622년)는 선무2등 공신에 녹훈(錄勳)된 충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