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00여 년 전 달성배씨 운암 배진이 입향하면서 심었다는 전남 나주시 봉황면 월곡리 이팝나무(전남도 기념물 제163호)
이팝나무의 줄기
월곡마을을 개척한 운암 배진의 유허비
청동기 시대 유물인 마을앞의 입석
달성배씨 세장비
달성인 운암 배진과 나주 월곡리 이팝나무
나무만 보기 위해서 왕복 1,000리가 넘는 전남 나주를 3번이나 방문했다. 경비며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수식목(手植木)을 찾아다니는 일에 흠뻑 빠져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옛 사람들이 심은 나무에는 어렵게 발견되는 화석처럼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나무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단 한 가지나마 풀어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주시 봉황면 용곡리 월곡마을도 그래서 찾았다. 약 500여 년 전 대구가 본향인 달성인 운암(雲巖) 배진(裵縉)선생이 심은 이팝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163호)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월곡마을 유래비
달성배씨의 시조 지타 문양공 후 중조 휘 현경 무열공은 고려 태조께서 통합 삼한 시 일등공신이시고 그 후 19세 손 진(縉) 운암공은 학문과 덕망이 남다르게 뛰어남으로서 성균관 훈도로 천거되어 많은 제자를 배출하셨다. 진 운암공은 오백여 년 전 이곳에 입향 하시어 마을 터를 잡아 월곡이라 하고 마을 중심에 이팝나무를 심고 그 후 느티나무도 심어 현재 마을 당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수령 500여 년의 노거수로 매년 5월 상순경에 눈송이처럼 하얗게 꽃이 피면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서기 1982년 12월 3일 전남도 지방문화재 10-21-13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건립된 달성배씨 제각이 있었으나 장구한 세월에 노후 되어 서기 1920년에 재 복원하여 제각명을 원묘제라 칭하고 있다.
본 마을은 봉황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키로 거리에 있고, 명산인 덕룡산 줄기의 원림산 정기를 받아 옛날에는 부촌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도 근면 성실과 융화단결로 넉넉한 인심을 지니고 출향인사까지도 애향심이 탁월하여 유대를 돈독히 하고 상부상조하는 모범적인 마을 이다.
오랜 숙원이었던 마을 회관이 선정되어 서기 1998년 정부보조금 3,000만원과 주민 및 출향인사들의 성금 1,300만원 합계 4,300만원이 소요되어 준공에 이르렀다.
마을 구성은 서기 1970년대에는 70여 호 달했으나 지금은 달성배씨 32호, 강화최씨 2호, 평택임씨 1호 등 35호가 정감 있게 살고 있다. 현황은 총면적 69정보이고 임야 37정보, 답 18정보, 전 14정보이다.
1998년 9월, 일
배 범 수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유는 비록 세련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 있는 내용은 다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신라 여섯 촌장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이자 우리나라 모든 배씨의 시조인 지타(祗沱) 공(公)을 맨 머리에 소개해 달성배씨의 뿌리 깊은 연원을 밝힌 점, 이팝나무를 운암이 심었으며 당산목이라고 강조한 점, 가구 수의 증감사항, 구성원의 성씨, 경지면적 등을 소상히 기록해 놓아 농촌사회의 변화나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남겼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돌에 새겨 이를 보며 살아갈 후손들 역시 선대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대를 이어 조선(祖先)을 섬기고, 나무를 보호하며 고향을 지키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나주로 향하면서 비록 5월 하순이지만 꽃이 만발해 있기를 바랐고, 본향인 대구에서 먼 그곳에 자리 잡아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호남인의 일원으로 살아오도록 씨를 뿌린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이 궁금했다.
봉황면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불미지국으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터미널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월곡마을로 향했다. 면 소재지에서 4킬로미터라고 하여 걸을 까 하다가 하도 더워 택시를 이용했다. 이팝나무 꽃은 이제 막 시들기 시작했으나 사진은 찍을 만 했다.
달성 배씨가 남도에 처음 정착한 것은 문종(文宗) 연간 문과에 급제해 성환 찰방을 지낸 달성 배씨 18세 손 배두유(裵斗有)로부터 비롯된다. 수양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무리를 모으는 것을 보고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알고 가족을 데리고 화순의 능주 대곡에 은거했다. 그 후 실제로 단종이 물러나자 외부활동을 중지하는 한편 정사(精舍)의 편액을 우재(遇齋)로 바꾸고 일생을 보냈다. 후에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들로 전생서(典牲署) 주부 서(緖)가 있고. 손자 휴재(休齋) 배상경(裵尙絅)은 점필재의 문인이었다. 역시 대과에 급제해 정주 목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휴재의 장남 배진(裵縉)이 능주 대곡에서 봉황면 월곡으로 이거, 오늘에 이른다.
전국에는 크기도 더 크고 품격도 더 높은 이팝나무가 몇 그루 있으나 수식자가 명백히 알려진 나무는 이 나무밖에 업다. 따라서 운암은 우리나라에서 조경용으로 가장 먼저 이팝나무를 심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강공 양팽손 선생과 화순 달아실 무환자나무 (0) | 2010.06.01 |
---|---|
충신 문극겸과 나주 산포면 도민마을 감나무 (0) | 2010.05.26 |
창원인 황전선생과 영주 병산리 갈참나무 (0) | 2010.05.17 |
계수나무 토끼 한마리♪∼ (0) | 2010.05.15 |
우계인 이수형선생과 봉화 도촌리 회화나무 (0) | 2010.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