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평화벨트, 경북 브랜드로] <2>칠곡·영천·영덕 전투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 교란 인천상륙 양동작전 | ||||||||||||||||||||||
◆칠곡 '다부동 전투'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도하해 마산·왜관·영천·포항을 잇는 경계선을 압박하고 있던 북한군의 8월 공세는 필사적이었다. 8월 5일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은 주력인 제13사단, 3사단, 1사단 등 군단 병력(2만1천여명)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대구 점령을 기도했고,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과 미 제27연대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천200여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다부동전투는 북한군과 국군이 모든 전투력을 동원한 결전이었으나 국군 제1사단의 필사항전으로 북한군의 예기를 꺾고 대구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328고지(석적면 포남리)~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대구를 지켜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55일간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과 적군 모두 수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16일 왜관철교 북쪽에는 B-29 폭격기 98대가 동원된 가운데 6·25전쟁 사상 전무후무한 융단폭격이 이뤄졌고, 21일 밤에는 다부동 계곡에서 개전 이래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다부동전투를 통해 한미간의 실질적인 연합작전이 이뤄진 것도 의미를 갖는다. 이 전투에서 정예 전투력을 소진한 북한군은 9월 공세 때 영천과 안강지역에서 일부 돌파구를 형성했으나 여세가 없어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했다. 다부동전투로 전세가 역전되고 부산 교두보 확보를 확신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구체화된 것이다. ◆'영천전투' 1950년 9월 다부동방면 돌파에 실패한 북한군이 공격방향을 영천으로 바꿔 기습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보현산 일대에 대한 국군의 방어태세가 다른 지역보다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포항 죽장-영천 축선상에 제15사단을 투입, 국군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했다. 보현산 지구를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의 주저항선이 이미 무너져 영천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영천-포항을 연결하는 낙동강전선의 유일한 보급로가 차단되고 국군 제1, 2군단이 분리돼 낙동강 방어선 붕괴로 인접한 대구와 경주는 물론 부산마저 상실할 최대의 위기였다. 영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UN군은 부득이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도 세웠다. 9월 5일 북한군 약 2개 대대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자양-영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인근 고지를 공격했으며 오후 북한군 제50연대, 56연대 병력이 언하동 일대까지 진출했다. 6일 새벽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읍을 점령한 뒤 남쪽 완산동에서 임포 사이에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제1사단 11연대와 제6사단 19연대를 제8사단에 배속해 영천 전체를 완전히 탈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 오후 국군 제8사단 공병대대와 제3연대 1대대가 미군 전차소대와 함께 영천읍을 공격한 뒤 탈환했다. 8일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으로 영천읍이 다시 함락됐지만 한시간도 안돼 국군 제19연대 3대대가 재탈환했다. 국군 제2군단은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하고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10일 새벽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제8사단은 배속된 제11연대, 제19연대를 포함한 5개 연대로 북한군 제15사단 주력부대가 전개한 완산동에서 대의동 일대를 남, 서, 북쪽에서 포위 공격해 3일만에 섬멸하고 영천을 완전히 장악했다. 10여일간의 혈전에서 국군은 최소의 희생(50명 전사)으로 북한군 3천800여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생포했으며 전차를 비롯한 각종 장비 2천500여점을 노획했다.
◆영덕 '장사상륙작전'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적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당시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하고, 북한군의 정보 교란을 목적으로 동해안 포항 북쪽 25km 지점인 장사에 유격부대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1950년 8월 대구 등지에서 모집된 학도병 600여명은 밀양의 유격대총사령부에서 일주일간의 훈련을 받은 후 9월14일 1인당 3일분 식량과 탄약 등을 지급 받고 부산 제4부두에서 LST(전차양륙함) 문산호(2천700t)에 승선했다. 병력은 독립 제1유격대대 772명과 통신병, 헌병 등 모두 841명이었다. 다음날 새벽 5시쯤 문산호는 장사상륙지점 4km 해상에 도착했으나 높은 파도와 북한군의 맹렬한 사격 등으로 결국 좌초했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은 좌초한 문산호에서 백사장 소나무까지 길이 30m짜리 4조 밧줄을 맨 후 4시간의 처절한 사투 끝에 전원이 상륙에 성공했다. 그곳에서 4일간 적과 교전을 벌이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19일 오후 LST 해군수송선를 타고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전사 139명, 부상 92명의 희생을 낳았고, 급박한 철수작전에서 39명이 구조선을 못 타 적의 포로가 됐다. 당시 학도병들은 귀항 후 신문호외를 보고 자신들의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임을 알았다고 한다.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구원은 "장사상륙작전은 안강· 포항 일대에서 국군과 팽팽하게 대립하던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도 충분히 해냈다"며 "맥아더 장군이 이들의 희생을 애도해 친필 비문을 남길 만큼 한국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라고 말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영천·민병곤기자minbg@msnet.co.kr 영덕·박진홍기자 pjh@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10년 06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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