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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문화코드가 되어버린 『토정비결(土亭秘訣)』은 16세기를 살아간 기인 학자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저작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와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지함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토정이 이지함의 호라는 사실조차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토정비결』의 명성에 비하면 이지함의 이름은 초라하다. 그러나 실상 이지함은 서경덕, 조식 등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처사형(處士型) 학자였다. 이지함은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신분에 구속받지 않고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지함은 ‘외출할 때 철관을 쓰고 다니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기인적인 풍모도 분명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한 경제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적극적으로 민생 안정과 국부(國富) 증진 정책을 제시한 점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지함의 이러한 사상은 사방을 유람하다가 만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적극적으로 응했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그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체득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지함은 1573년 포천현감에, 1578년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인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에는 그가 지향한 사회경제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포천현의 상황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五臟)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抱川之爲縣者。如無母寒乞兒。五臟病而一身瘁。膏血盡而皮膚枯。其爲死也。非早卽夕。]’라고 하여 당시 포천현이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타개할 수 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먼저 제왕(帝王)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며,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이며,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下策)으로 정의했다. 이중에서도 이지함이 특히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즉 당면한 현실에서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하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결국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말업관(末業觀)과도 연결된다. 아래 자료에 나타난 땅과 바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사회경제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땅과 바다는 백가지 재용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이것은 형이하(形以下)의 것이긴 하지만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한다면 그 이익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그런데 은을 주조하고, 옥을 채굴하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는 일처럼 사적인 경영으로 이익을 추구하고 남는 것을 탐내며 후하게 할 것에 인색하게 하는 일은 비록 소인배들이 밝히는 일이요 군자는 가까이 하지 않는 일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하여 백성들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의 권도(權道)입니다.[陸海者。藏百用之府庫也。此則形以下者也。然不資乎此。而能爲國家者。未知有也。苟能發此。則其利澤之施于人者。曷其有極 若稼穡種樹之事。固爲生民之根本。至於銀可鑄也。玉可採也。鱗可網也。鹹可煮也。營私而好利。貪嬴而嗇厚者。雖是小人之所喩。而君子所不屑。當取而取之。救元元之命者。亦是聖人之權也。]」 -『토정유고(土亭遺稿)』권 상(上),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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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서원(化巖書院)_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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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권도를 펼 수 있다는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나 수공업이 천시된 당시 사회에서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방안으로 이지함만큼 적극적으로 말업(末業)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은 처사(處士)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조대에 마침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치에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으나 결국은 현실정치의 높은 벽만을 느끼고 사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민간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바탕 위에서 끌어낸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18세기 북학파로 지칭되는 후대 학자들의 이념과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
박제가는 자신의 저술 『북학의』에서 두 차례나 이지함을 언급하면서 16세기 이지함이 주장하였던 해외통상론을 적극 평가하였다. 박제가는 「선(船)」의 항목에서,
「만약 표류인들이 와서 연해 제읍(諸邑)에 정박하면, 반드시 선박제조 및 다른 기술을 상세히 묻고 재주가 있는 장인으로 하여금 그 방식에 의거하여 배를 만들게 한다. 혹은 표류한 선박을 모방하여 배우고, 혹은 표류한 사람을 머무르게 하여 접하면서 그 기술을 배운 후에 돌려보내는 것도 무방하다. 토정이 일찍이 외국의 상선(商船) 수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했는데, 그 견해가 탁월하면서도 원대하다.[若有漂人來泊沿海諸邑。必須詳問船制及他技藝。令巧工依方造成。或從漂船倣學。或留接漂人盡其術。而後還送不妨。土亭嘗欲通外國商船數隻。以救全羅之貧。其見卓乎遠矣。]」
고 하면서, 이지함의 탁견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지함의 사상이 200년을 뛰어 넘어 북학파의 중심인물 박제가에게 계승되고 있는 점은 무척이나 주목된다.
이지함은 생애의 대부분을 처사의 삶을 살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러한 유랑생활을 통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들을 접하였다.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한 일에서 보듯 그의 사회경제사상의 핵심이 민생문제 해결에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특히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개방성은 신분이 미천하고 한미한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이지함은 점술과 복서에 능통하여 불안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호를 가탁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게 친숙한 책의 하나가 된 것에는 이지함의 사상이 이 책에 잘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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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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