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도시 대구, 그 명소를 찾아서
들어가는 말
낙동강이 서남부 지역을 감싸고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며 북쪽은 팔공산은 병풍의 역할을 하고 비슬산맥이 척추가 되어 기름진 충적평야를 이룬 대구는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신라와 가야를 아우른 독특한 문화를 꽃피워왔다.
최근 달서구 월성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석기가 발견되어 대략 2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뿌리 깊은 도시다.또한 청동기 유물도 많아 국보 137호인 비산동의 청동검을 비롯하여, 신천동과 만촌동, 서변동 등 대구지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타 지역의 청동기 유물보다 우수하여 청동기 시대 대구사회의 수준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또한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대구역, 달성공원 부근을 비롯해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서부터 수성들, 화원, 가창 등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었으나,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대구의 역사
261년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은 것으로 보아 신라의 국방요충지였으며 통일 후인 689년 도읍을 경주에서 아예 달구벌로 옮기려 한 사실과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때 당시의 대구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어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동수대전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을 말한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만나 일대 격전을 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심복장수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장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을 위하여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동명으로 남았다.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다. 왕건이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던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은적, 왕굴 등은 이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라고 알려져 있다.고려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영속되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현 경산)에 영속되어 있었다.1143년(인종21년)에 대구현은 현령관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12세기 후반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큰 거점이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조선이 세워진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여 확장 발전됨에 따라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교육활동이 활발해졌으며, 1448년(세종30년)에는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험 실시되어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창이란 지방 향촌이 공동으로 설치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흉년이 들 때나 굶는 자가 있을 때 대여하는 제도)1466년(세조12년)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영남내륙 교통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1601년(선조34년)에는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에 이전 설치하면서 경산현, 하양현, 화원현을 포괄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영남지방의 행정,사법,군무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되었다.대구는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해 왔고, 1895년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경상도: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 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다.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다.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다.1945년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6.25 동란 시에는 낙동강 방어 작전의 최후 보루도시로 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구 방어전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심화되고 있을 때, 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학생의거는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1981년 달성군의 월배, 성서,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8년는 달서구가 신설되어 7개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1995년 1월에는 지방자치의 완성년도로 중앙정부직할의 시(市) 명칭을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여 지방화시대의 원년을 맞이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으로 행정구역이 광역화되어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본선경기를 치르고 2003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하였으며 2011년인 올해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대구가 자랑스러운 12 가지 이유
1,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하는 도시
대구는 말을 늦게 하거나 걸음마를 늦게 하다가 청소년기가 되어 또래아이들보다 키가 더 크고 말을 더 잘 하는 아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하는 도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주`군`현제도를 시작 할 때부터 조선조 초 14세기까지 거의 600여 년 간 최 말단 행정기관인 현에 불과했다. 1419년(세종 1) 비로소 군이 되고 연이어 도후부가 되었다가 17세기에는 영남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에 이르렀다.
2, 청동기 유적의 보고이다.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수성지역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주도했던 어느 공무원에 의하면 벌판 전체에 고인돌이 즐비했다고 한다. 기원 전 10세기 이처럼 광범위하고 화려한 청동기문화를 꽃 피운 도시가 없다.
3, 겨레의 지킴이 팔공산이 있는 도시
신라 5악의 중악이자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 받은 곳, 임란 의병활동, 한국동란 마지막 보류 등 호국의 산 이자, 불교의 성지, 문화재의 보고이다.
4, 일찍 국제화된 도시
문화가 우리나라 보다 발달되었던 중국계 귀화인, 달성 하씨, 두릉두씨 대구빈씨와 일본계 귀화인 사성 김해김씨가 내국인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 온 땅.
5,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신분과 계층을 넘어 온 국민이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던 3,1운동의 모태가 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선조들이 살았던 도시
6, 한국 근대예술의 발상지
시부분의 이상화, 이장희, 음악 현제명, 박태준, 서화 서병오, 서동균, , 미술 이인성, 소설, 현진건, 영화 이규환 등 장르별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배출된 진정한 예향의 도시
7,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2, 28의거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막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4, 19의 도화선이 된 청년학생들의 의거가 메아리쳤던 도시
8, 천연기념물 제1호가 있는 땅
국보 제1호 남대문, 보물 제1호 동대문이 서울에 있다면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는 대구에 있다. 국토의 1%에 불과한 대구에 자연유산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도시
9,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토성이 있는 도시
대구의 상징적인 공간이자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토성으로 이팝나무, 말채나무 팽나무, 쉬나무 등 향토수종의 보고
10, 국내 최대의 불로고분군
4~5세기에 조성된 왕릉버금 가는 고분 211기가 밀집해 있는 국내 최대의 고분군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도 손색이 없다는 주장이 있음
11, 초조대장경이 모셔진 도시
천 년 전인 1011년 고려국민의 정성으로 판각된 성보 초조대장경이 당시 수도인 개경의 큰 절을 제치고 대구에 봉안된 사실만으로 자랑스러운 일임
12, 공동체정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창이 설치된 곳, 달성이 군사시설로 필요하다고 할 때 기꺼이 헌납한 선조들의 피가 흐르는 시민, 국난극복과 민주정부 수립에 앞장섰던 시민이 사는 도시.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할 명소들
뿌리 깊은 도시 대구의 어느 곳 한 군데 명소가 아닌 곳이 없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을 위해 굳이 몇 곳을 선정한다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해 객관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고 필자의 사견인 만큼 시민 각자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산
0, 팔공산 : 호국의 얼이 깃든 산, 문화재의 보고, 불교의 성지
0, 비슬산 : 일연 스님이 득도한 산, 휴양림이 있는 산
0, 앞산 : 반세기 만에 민둥산을 원시림 수준으로 가꾼 시민의 휴식처
0, 대덕산 : 젊은이들의 무대, 국제대회가 열리는 곳
0, 두류산 : 예술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산
□, 대구의 녹지축이자 시민들의 휴식처 공원과 수목원
0, 달성공원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이 있는 대구의 상징
0, 경상감영공원 : 옛 감영 터에 자리 잡은 영남의 심장
0,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세계 최대의 헬기로 나무를 옮겨 심은 푸른 대구 가꾸기의 상징적인 공원
0, 2, 28중앙청소년공원 : ngo와 시정부의 상생의 정신이 깃든 젊은이의 공간
0, 월곡역사공원 : 단양 우 씨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숨 쉬는 곳
0, 대구수목원 : 국내에서 최초로 쓰레기매립장에 조성한 수목원
0, 청라언덕 : 박목월, 현제명, 박태준의 혼이 묻어 있는 대구의 몽마르트
0, 도동측백수림 : 우리니라 천연기념물 제 1호
0, 화원동산 : 낙동강 700리 제일의 경승지, 임자 없는 나룻배 촬영지
도동서원 수월루
□, 종교시설
0, 전통사찰 및 기타 불교사찰
-동화사 : 한국불교의 대들보
-부인사 :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창건한 절
-파계사 : 영조의 탄생설화가 깃든 절
-유가사 : 비슬산의 대표적인 고찰
-최정 심인당 : 대한불교 진각종의 발상지
0, 가톨릭과 개신교
-계산성당 : 영남지방 최초의 성당
-제일교회 : 영남지방 최초의 교회
0, 향교와 서원
-대구향교 :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와 동방의 18현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조선시대 대구의 대표적인 공교육기관
-도동서원 : 동방 오현의 수현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구암서원 : 달성 서씨들이 배출한 학덕이 높은 분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녹동서원 : 귀화왜장 김충선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청호서원 : 조선 중기 대구지역 사림의 대표 모당 손처눌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인흥서원 : 명심보감의 저자 추적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육신사 : 단종복위에 가담했던 취금헌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신숭겸장군 유적지 :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을 기리고 향사를 지내는 곳
0, 강과 하천
-낙동강 : 영남의 젖줄
-금호강 : 대구 발전과 강안문학의 요람
-신천 : 달구벌문화의 발상지
0, 전통마을
-옻골 : 조선시대 민가와 전통마을로 형성된 경주최씨의 집성촌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한옥마을
0, 기타 명소
-동성로 : 대구지역 대표적인 젊은이들의 거리 쇼핑의 명소
-약전골목 : 전통 한의약업의 거리
-진골목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의 발상지 일제강점기 대구 상류층의 거주지
-서문시장 :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시장
□, 맺는 말
옛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아무 쓸모없다는 뜻이다.
뿌리 깊은 도시 대구는 도처가 명소다 그러나 이를 잘 가꾸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세계적인 명소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가 본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 같이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덕은 지구촌사람들이 가보고자 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 까닭은 어디 있을까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끊임없이 홍보하고 잘 가꾸었기 때문이다.
시민헌장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고장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모두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선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방치되고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가 다른 건물로 바뀌었으나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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