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남파 장학과 구미 여차정의 백일홍

이정웅 2011. 8. 16. 14:57

 

 

 

 남파 장학선생이 1659년 46세 되던해 심은 수령 350여 년의 백일홍

 가까이에서 본 백일홍

 백일홍 줄기

 보후수임을 알리는 표지석

 여차정 전경

 여차정 현판

 남파선생 유허비

 이름다운 흙담

여차정에서 바라 본 낙동강

 

남파 장학과 구미 여차정의 백일홍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10일 이상 피지 않으며 세상의 온갖 즐거움도 오래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말 그대로 붉은 꽃이 100일정도 피는 나무라고 지어진 이름이다. 다만 초본류 백일홍이 있어 나무 목(木)자를 앞에 붙여 목백일홍이라고도 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배롱나무라고도 한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자미화(紫微花)라고 한다.

육종 기술이 발달되면서 희거나 보라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으나 뭉뚱그려 백일홍이라 한다. 꽃이 소담스럽고 붉은 색이 선비의 충절을 상징해서 그런지 매(梅), 난(蘭), 국(菊),죽(竹)으로 일컬어지는 사군자 반열에는 들지 않으나 소나무처럼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나무 중 하나다.

고관의 저택이나 묘지나 정자, 서원, 재실 주변에 많이 심었다. 8월 이맘때가 절정이다. 특히 전라도 담양에 소재한 명옥헌 원림(明玉軒園林, 명승 제58호)은 우리나라 최대의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양귀비와 로맨스로 유명했던 당 현종도 이 꽃을 좋아해 조정의 중요한 기관의 하나인 중서성(中書省, 일반 행정을 심의하는 중앙관아)을 자미성(紫薇省)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조선 초 시, 서, 화에 능해 삼절로 불렸던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양화소록>도 등장한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정원 가에서 환하게 사람의 혼을 뺄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 있으니 풍격(風格)이 최고이다. 한양의 공후(公侯) 저택에서는 백일홍을 뜰에 많이 심어 높이가 한 길 넘는 것도 있었다. 근래에는 영북(嶺北,조령의 북쪽 지금의 충청도 이북지역)의 기후가 매서워서 대부분 얼어 죽었는데 다행스럽게 호사가들이 보호하여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열에 한둘이니 애석하다.----이하생략

 

인재(仁齋, 강희안의 호)생존 시에도 서울의 고관들 집에 많이 심겨졌으며 추위에 약한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영하(嶺下)지역이지만 겨울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대구에서도 옮겨 심고 난 후 2~3년 정도 짚 등으로 보온을 해 주어야한다.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 내 순절단에 주위에도 큰 배롱나무가 있다.

그 이외에도 큰 백일홍이 여럿 있으나 안타까운 일은 심은 사람이 밝혀진 나무가 없다. 그런데 구미시 임수동 331번지 여차정(如此亭)에 백일홍 노거수가 있다는 것을 아우 만농이 보내 준책을 통해 확인했다. 그곳은 남파(南坡) 장학(張澩, 1614~1669)선생의 강학처이기도 하다.

남파는 1614년(광해군 6) 지금은 구미시가 된 인동에서 아버지 장경우와 어머니 광산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만회당은 당시 이름 높은 선비이자 정묘호란 시 인동지역의병장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11살 때 아버지에 이어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1634년(인조 12) 공의 나이 21세 때 인동향교를 이건하게 되는데 재정이 부족해 감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공이 향내 사림을 대표해 청원서를 올려 성사시켰다. 글이 간절하고 성의가 있어서 감사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다.

1642년(인조 20) 식년시 생원 1등 3위로 합격했다. 여헌 선생을 포은을 주향으로 하는 영천 임고서원에 배향(配享)하는데 힘을 썼다. 1652년(효종 3) 창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스승 여헌선생이 살았던 부지암정사를 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1659년(효종 10) 공의 나이 46세 여차정을 짓고 강학을 했는데 백일홍은 이 때 심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이다. 정자 이름 여차(如此)는 '더 없이 가난하기도 하나 더 없이 부유하기도 하고, 더 없이 좁기도 하나 더 없이 넓기도 하고 더 없이 더럽기도 하나 더 없이 조촐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듬해 유양원 등이 모의하여 당시 인동부사로 와 있던 유정(兪椗)을 몰아내려고 했는데 이 일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동지의금부사 권시 등이 공이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받아드려지지 않고 충북 보은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 때 공은 유배생활을 일기로 남겼다. 1661년(현종 2) 허적(許積)이 석방할 것을 진언해 해배되면서 8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세상일에 뜻을 접고 은인자중하며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다가 1669년(현종 10)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저서로 <남파집>을 남겼다.

문중 홈페이지에 그려진 지도가 현지와 달라 찾는데 애를 먹었다. 공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꽃잎마다 아로새겨져 있어 그런지 붉디붉은 백일홍이 만개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