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한 시골에서 오형제를 모두 대과에 합격시킨 함양인 박눌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 공은 이 나무를 심고 자호도 행정(杏亭)이라했다.
띠로 만든 정자라는 의미의 모정
모정 현판
우리나라 십승지의 한 곳인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 세워진 박눌을 배향한 금곡서원
금곡서원 앞에 서 있는 박눌의 신도비
박눌의 아들 오형제가 태어난 상주시 이안면 이안1리
오형제를 대과에 합격시킨
박눌과 상주 이안리 은행나무
자식 농사(農事)라는 말이 있다. 때맞춰 씨앗을 뿌리듯이 제 때 공부를 시키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며, 알맞게 물과 거름을 주어 낱알을 튼튼하게 하듯 적당한 채찍과 훈육을 통해 인간다운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일이 농사짓는 것과 같이 정성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물농사는 정성을 들인 만큼 소출을 얻는데 비해 자식농사는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따라서 누구나 바라는 일이기는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자식자랑은 아내자랑과 함께 금기시되어 있다.
이러한 관습은 대다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오형제를 대과에 급제시킨 자랑스러운 아버지상을 가진 행정(杏亭) 박눌(朴訥, 1448~ 1528)이 심었다는 수령 500여 년의 상주 이안리 은행나무를 찾아가는 마음은 약간 들떠있었다.
박눌은 본관이 함향으로 1448년(세종 30) 성주군 선남면 오도종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 박소종(朴紹宗)이 상주 이안으로 이거할 때 함께 왔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깊고 성품이 온화하며 의지가 굳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고 창락도 찰방(昌樂道 察訪)을 지냈다.
창락도는 오늘 날 풍기 일대에 있었던 역원(驛院)으로 순흥, 영주, 봉화, 예천, 안동, 예안의 간이역을 거느린 경상도 북부지역의 큰 역었다. 찰방(종 6품)은 곧 역장을 말한다.
공은 다섯 아들을 누각에 올려놓고 교육을 시켰는데 사다리를 치워 못 내려오게 할 만큼 공부를 독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의 노력으로 맏아들 거린(巨鱗)은 1504년(연산 10)에 급제해 장령을 지냈고, 둘째 형린(亨鱗)은 1516년(중종 11)에, 이조참의, 셋째 홍린(洪鱗)은 1522년(중종 17)에, 대사헌을 지내고 넷째 붕린(鵬鱗)은 1533년(종종 28)에, 한림, 시강원 설서, 다섯째 종린(從鱗)은 1532년(중종 27)에 이조정랑을 지내 5형제가 모두 대과(大科)에 급제 국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인재가 되었다.
특히, 막내 종린(1496~1553)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향인 예천 용문면 <정감록>에서 말하는 우리나라 십승지의 한 곳인 금당실에 자리 잡아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문집이나 유고를 남긴 사람만하여도 40~50명이 된다고 한다.
대과 급제자 한 사람만 나와도 가문의 영광이었던 시대를 것을 감안하면 주위에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이를 두고 예조, 공조판서를 지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세상에 아들 다섯 낳기도 어렵고 세지생오자난(世之生五子難)
다섯 아들이 급제하기도 어렵고 오자등과난(五子登科難)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어렵다 오자구문난(五子俱文難)
삼난가(三難家) 즉 하기 어려운 일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한 집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띠집 즉 모정(茅亭)을 짓고 여기에 은행나무를 심고 자호를 행정(杏亭)이라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우헌 채헌징(蔡獻徵1468~1726)은 '적덕(積德)한 군자요 교육을 즐기는 현명한 스승'이라고 했다.
성공의 배경에는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김씨의 역할도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김씨는 청빈한 생활이 곧 보배라는 안동인 보백당 김계행(1431~1521)의 두 딸 중 한 분이다. 다른 한 딸은 풍산인 유자온에게 시집갔는데 임란 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살피는데 앞장섰던 명재상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바로 증손이다.
1528년(중종 23)에 돌아가시니 향년 81세, 중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보냈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상주의 청암서원과 예천 금당실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공이 심은 나무는 마을 뒤 높은 언덕 잡목과 어울려 있었다. 촌로께서 가르쳐주지 아니하였으면 모를 만큼 외진 곳이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원줄기는 죽은 것 같고, 부분적으로는 썩기도 했으나 그래도 수세는 강건했다.
한적한 시골, 한미한 집안에서 다섯 명의 아들을 모두 대과에 합격시켜 고을을 빛낸 분이 심은 나무라고 보기에는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 같다.
그냥 크고 우람한 나무라도 보호수 아니면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데 스스로 호(號)로 삼을 만큼 공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나무가 그냥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받아 금곡서원 주변에 심어 공의 뜻이 오래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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