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신재 주세붕선생과 경북항공고등학교 교정의 은행나무

이정웅 2011. 5. 31. 20:49

 

 

 

 1543년 신재 주세붕 선생이 풍기향교를 이건하고 정문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당초 3그루 심었다고 하나 2그루만 남았다.

 교정 정면에서 본 은행나무 좌측이 암나무 우측이 수나무다.

 영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수나무

 1982년 10, 26일자로 지정된 보호수 표석

신재  주세붕 선생 영정

 풍기인삼조합구내에 설치된 송덕비 그는 풍기군수를 하면서 인삼재배법을 보급시켰다.

 신재 주세붕 선생을 기리는 김계하님의 시

 풍기의 진산 소백산 연봉 

 풍기항교

풍기에 있는 경북항공고등학교 입구 조형물

 

신재 주세붕선생과 경북항공고등학교 교정의 은행나무

 

 

조선조 고을의 수령은 그가 하기에 따라 탐관오리도 되고 착한 목민관도 된다. 그럼에도 임기만 채우고 떠난 사람이 있는 가하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정을 펼친 분이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한 분이 신재(慎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상주(尙州)로 윗대는 여말 개혁파들의 조선개국을 반대하며 경남 합천으로 내려와 은거해 온 선비집안의 후예다. 아버지 문보(文俌)대에 함안으로 옮겨 칠원(漆原)에서 출생했다.

선대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주세붕 선생의 현달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힘썼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했으며,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가 되었다. 공은 이곳에서 피폐해진 향교를 이건하고, 1543년(중종 38) 사림과 그들의 자제의 교육과 이 지역 출신 안향(安珦)을 제향(祭享)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니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嚆矢)다. 이 후 퇴계가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은 이 곳에서 학문만 장려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나라에 바치는 공물인 인삼(人蔘)채취가 어려움을 감안 인삼재배법을 직접 개발하여 오늘 날 풍기가 인삼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 1548년(명종 3)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가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여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소수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지 竹溪志》·《해동명신언행록 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 進獻心圖》가 있고, 문집으로《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공은 1543년(중종 38) 향교를 이건한 기념으로 정문인 양심루 앞에 은행나무 3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한국동란 때 폭격으로 1그루가 죽고, 향교 땅 일부는 풍기고등학교에 내 주게 되었으며 학교 또한 경북항공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문중 자료에 의하면 그 후 누군가 1그루를 더 심어 3그루가 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았다. 다행(?)인 것은 1그루는 암나무고 다른 1그루는 수나무였다. 비록 폭격으로 쓰러졌다고 해도 음양의 조화를 맞추려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본래 땅보다 1미터정도 낮게 정지작업을 해서 그런지 나무가 서 있는 곳이 섬같이 고립되어 있다. 생육 상태는 좋으나 암나무는 굵기가 상당히 떨어진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인품과 사회적인기여도, 수령(樹齡) 등을 감안해 볼 때 천연기념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겨우 영주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뿐인데 그것도 2그루가 아니고 1그루 즉 수나무였다. 또한 나무 주변 어디에도 신재가 심었다는 단 한 줄의 글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 아쉬운 것은 매일 이 나무를 처다 보며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한 학교마저 5세기 전 위대한 교육자 신재가 심은 나무라는 것을 알리는 팻말하나 설치해 두지 않았다.

풍기를 문향으로 이끌고 인삼재배법을 보급하여 살기 좋은 풍기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한 신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은 이외로 풍기인삼협동조합이었다.

그 곳에는 선생을 기리기 위해 김계하(金桂河)가 쓴 시문이 돌에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만고심산 소태백에 / 진기화 있으니 /하늘이 내려주신 영초(靈草), 영근, 선삼이네

신재선생 울밑 재배 / 그 역사 오백여년 / 만방인의 불로영약 / 이 고장 자랑일세

토산유업 길이이어 / 흙과 함께 살아가세

 

또한 그 곳에는 신재선생의 송덕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