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이 아버지와 함께 심은 은행나무 열매가 열리자 온 가족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영랑 사진
영랑생가 안채
영랑 생가 사랑채
영랑 현구 문학관
영랑 부친 김종호옹(이 사진과 아래 영구기념비 사진은 영랑의 3남 김현철님이 보내주었다)
가뭄으로 주민들의 생계가 어렵자 식량을 내 놓은 김종호옹을 기리기 위해 칠량면 주민들이 세운 영구 기념비
김영랑 생가(生家)의 은행나무
산야가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5월 초 대구시청문학회회원과 명예회원 일행은 강진군 김영랑(金永郞, 본명 金允植 )생가를 찾았다.
뜰 안에는 모란이 만개하고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가득했다. 1년 12달 중 불과 보름 남짓 꽃이 피는 것을 감안하면 그날 방문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해설사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지 지 않기 위해 귀를 바싹 기우렸다.
500여석을 하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는 것
평소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는 것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는 것
사랑했던 여인이 파란만장한 무용가 최승희였다는 것
납북은 면했으나 북한군이 쏜 포탄의 파편에 쓰러졌다는 것
제헌국회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야기 등
시인 영랑의 또 다른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 나는 그의 시가 말하듯 아주 문약한 시인쯤으로 알았고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역시 연애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시 정도로만 알았었다.
또한 지주(地主)라고 하면 흔히 소작인들을 괴롭혀 부를 축적하는 못된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랑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달랐다.
1906년 흉년이 들자 할아버지 김석기(金奭基, 1851~1922)는 군(郡)의 작천면들에게, 1911년 가뭄 때에는 아버지 김종호(1879~1945)가 칠량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어 주민들이 각기 보정안민비(輔政安民碑)와 영구기념비(永久紀念碑)를 세워 그들을 기려 주었다
소위 가진 자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영랑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아 나라의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힘쓴 모습에서 그 것을 읽을 수 있다.
해설사가 사랑채 앞의 큰 은행나무를 가르치며 영랑이 아버지와 함께 심은 것이라 해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안내판의 설명문 말미에 <조광> 1938년 9월이라고 써 놓아 1938년 조광(朝光) 9월호에 발표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을 강진군이 매입해 복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은행나무는 더욱 고귀하다. 생가 내에서 영랑의 손때가 묻은 살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유품(遺品)이기 때문이다.
설명문을 사진으로 찍었다.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니 아버지와 영랑본인이 심은 것을 이야기 한 것인지 아니면 영랑 본인과 아들이 함께 심은 것이지 애매했다.
영랑의 일생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정리한 책 '아버지 그립고야'의 저자이자 셋째 아들이며 현재 '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현철님에게 메일을 보내 확인했더니 해설사의 말이 맞았다.
독립 운동가이자 서정시인인 영랑은 1903년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경무 사이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으로 내려와 의거를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옥고(獄苦)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유학 중 독일의 문호 괴테와 영국의 서정시인 키츠 등에 심취했다고 한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한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그가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것은 1949년에 발령받은 대한민국 공보처 초대 출판국장 이었다. 남들과 달리 두루마기를 입고 출근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에 있던 일본 병풍을 치우게 하는 등 새나라 건설에 의욕을 불태웠으나 상사의 부당한 압력을 받자 취임 7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어 터진 한국동란 때 적이 쏜 포탄의 파편에 맞아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1950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조광 9월호<은행나무>에서 영랑은 '뜰 앞의 은행나무는 우리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 지 17, 8년인데 한 아름이 되어야만 은행을 볼 줄 알고 기다리지 않고 있었더니 천만이외 이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 뼘으로 셋하고 반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세알인데 이렇게 기쁠 때가 없었소이다. 의논성이 그리 자자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라 서로 맞대고 기쁜 체는 않지만 아버지도 기뻐합니다. 아들도 기뻐합니다.' 라고 했다.
해가 갈수록 영랑의 작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듯 은행나무 역시 무수한 가지를 뻗어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형제를 대과에 합격시킨 박눌과 상주 이안리 은행나무 (0) | 2011.07.22 |
---|---|
낙포 이굉(李浤)선생과 귀래정 은행나무 (0) | 2011.06.20 |
신재 주세붕선생과 경북항공고등학교 교정의 은행나무 (0) | 2011.05.31 |
천연기념물 소나무 줄기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0) | 2011.05.23 |
영의정 하연선생과 산청 남사마을 감나무 (0) | 2011.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