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하연이 심은 감나무
1986년에 세운 기념표석 당시 이미 수령이 580년이라고 해 2011년인 올해는 605년이 된다.
썩어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방부처리를 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수령을 700년으로 측정했다.
하연선생 영정 (경남 문화재자료 제278호)
하즙의 구거
원정공 하즙의 유허비
의
영의정 하연선생과 산청 남사마을 감나무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는 경북의 하회나 양동마을 같이 골목 구석구석에 오랜 역사와 전통이 묻어있는 곳이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태어난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주변의 산수에도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을 남쪽 산을 이구산(尼丘山)이라 하고, 주변을 감싸 흐르는 내를 사수(泗水)라고 한 점이다.
석가모니, 예수와 함께 세계 3대성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공자는 이구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며 사수가에서 위대한 사상가의 경력을 쌓았다. 아버지는 숙량흘(叔粱紇)으로, 부인 시(施)씨와의 사이에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들이 죽자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안(顔)씨라는 새 부인을 얻었다. 그 때 숙령흘은 60세 안 씨는 15살이었다. 비록 나이 어린 안 씨였지만 공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매일 이구산에 올라가 정성을 다해 기도한 끝에 마침내 공자(孔子,BC551~479)를 낳았다.
이름 구(丘)는 이구산의 구(丘)자를, 자(字) 중니(仲尼)는 둘째라는 중(仲)자와 이구산의 이(尼)자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사수는 공자가 학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러낸 곳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이나 산 이름 중에서 중국에서 따온 것이 많고, 그 중에서 본받을 만한 분들의 고향이나 거처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많은데 이곳도 역시 유학의 개조(開祖)인 공자를 흠모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바지로 이씨, 최씨, 하씨들이 많지만 두드러진 가문은 진양 하씨들이다.
고려 정·문종 양 대에 걸쳐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했던 시조 하진(河珍)의 8세손 하즙(河楫, 1303~1380 )이 여러 벼슬을 거쳐 마침내 공신에 올라 오늘 날 진주(晋州)의 다른 이름인 진천(晋川)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지고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공의 많은 후손들이 가문을 빛냈는데 증손 대에 와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배출함으로 남사리가 진양 하씨의 텃밭이라는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다.
세종 때 황희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 경재 하연(河演,1376~1453)은 포은 정몽주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20대 초반에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관, 집의 등을 지냈고 특히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여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원(寺院)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고로 환수하는 시책을 펼쳤다. 경상·평안도관찰사로 잠시 외직에 나갔다가 파직되어 귀양살이도 했으나, 곧 풀려나와 병조참판,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직책을 맡았다가 고희에 이르러서야 좌찬성이 되고 이어 우·좌의정을 거쳐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51년(단종 1) 78세에 돌아가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고, 자혜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은 효(孝)이다’ 하여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공직자로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청백리로 뽑혔다. 저서로는 <경재집(敬齎集)>이 있고 <경상도지리지> 등의 편찬에 간여했다.
사관(史官)이 쓴 인물평에는 “성품이 간단하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며 친족에게 화목하기를 인(仁)으로서 하고····글을 즐기고 시 읊기를 좋아하며 재산에 힘쓰지 아니하고 소리와 여자를 기르지 아니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관료로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밝게 살피기를 힘쓰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 하지 하니 하였다.” 라고 했다.
사후(死後) 합천의 신천서원, 문의의 우록서원, 진주의 종천서원, 장연의 반곡서원, 무주의 백산성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에 있으며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문효공 하연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남사리에는 그가 심었다는 감나무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감내하기 어려운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명물 산청곶감도 이 나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6년 후손들이 세운 표석에 당시 580년생으로 기록해 놓아 현재 수령은 605년 정도로 봄이 타당한데 최근 산림과학원이 700년이라고 해놓아 100여년의 차이가 있고, 더 아쉬운 점은 폭풍우나 돌발해충으로 언제 고사할지 모를 나무의 유전자가 살아있는 후계목을 길러 놓지 않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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