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를 몰래 가져와 우리나라에 의류혁명을 일으킨 삼우당 문익점선생이 생가에 심은 은행나무
삼우당을 기리기 위해 1461년(세조 7)에 세워 1554년(명종 9)사액된 도천서원
도천서원 현판
삼우당 선생 영정
삼우당 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 터 표석
목화시배지에 있는 선생의 사적비
진주의 선비 유문용의 쓴 행단기
문익점(文益漸)선생과 산청 사월리 행단(杏壇)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백성들의 옷차림이 오늘날과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신라나 고려 시대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삼이나 칡으로 만든 옷을 입어 추위에 떨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밀수(密輸, ?)로 목화씨를 가져와 의류 혁명을 일으켜 추위로부터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한 분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이다.
본관이 남평으로 1329년(고려 충숙왕 16)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자호(自號) 삼우당(三憂堂)은 백성들을 살뜰히 보살피지 못하는 자신의 역량과 인륜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지 못함과 이를 해결하는 데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12세에 목은(牧隱)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에게 학문을 배워 1360년 (공민왕 9) 포은 정몽주와 함께 급제했다. 그 후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성균관 순유박사 등을 지냈다.
1363년(공민왕 12)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성절사(聖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그곳에서 벼슬하고 있던 최유(崔濡)가 원의 힘을 빌려 공민왕을 몰아내고 같이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등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1398) 조의 졸기에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공민왕 13)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 고을 사람 전객영(典客令, 고려 조 벼슬의 일종?)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 삼우당 장인)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1367)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 (1375)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1440년 (세종 22) 영의정 증직과 부민후(富民侯)에 추봉(追封)되고,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를 받았다.
후일 남명 조식(曺植)이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삼우당을 일컬어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은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고.” 시로 찬양하였다. 이런 실록을 기록을 볼 때 항간에 떠도는 붓 대롱에 넣어 가져왔다거나 수행원 김(金龍)을 통해 노파가 지키고 있는데 물리치고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고향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 경남도 유형문화재)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이외 태어난 마을 생가터에는 생전에 그가 심은 은행나무와 괴천(槐泉) 유문용(柳汶龍, 1753~1821)이 1805년(순조 5)이 쓴 행단기(杏壇記)를 새긴 빗돌이 있다. 괴천은 기문에서 “곧게 서 있는 모양은 선생의 절의(節義)와도 같고, 무성한 모양은 선생의 덕택(德澤)과도 같으며, 맑고 수려함은 선생의 지조와도 같고, 높은 모양은 선생의 기상(氣象)과도 같으니, 진실로 이 나무를 보고서 현인(賢人)을 그리워할 수가 있다면 즉 또한 성인(聖人)을 그리워할 수가 있을 것이로다.
삼우당 생존 년대로 보아 수령이 600여 년이 넘었을 것이나 원줄기가 죽고 가지가 새로 돋아났기 때문인지 그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삼우당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이 나무뿐인 것을 생각하면 잘 가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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