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도성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
구한말 경기 화성에서 태어난 홍난파는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 가서 선교사로부터 바이올린과 서양 학문을 익혔으며,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음악 공부를 했다. 그는 1919년 우리나라 최초 음악 잡지인 '삼광' 창간사에서 "우리 조선은 깨는 때올시다.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때올시다. 할 때올시다. 남과 같이 남보다 더 낫게 할 것이올시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부자유에서 자유로 나가야 합니다. (중략) 비노니 우리 2천만의 형제여, 같이 힘쓰십시다"라고 했다. 국권을 잃은 민족을 깨우치고 계몽하려 한 선생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일본 유학 중 동경 심포니오케스트라와 동경신교향악단에서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고, 1931년 7월 미국 유학을 떠나 흥사단에도 가입했다. 1932년 3월 미국 시카고 한인회 주최로 열린 3·1절 13주년 기념식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은 지혜가 일본보다 우수하므로 미래가 밝으며, 경제·정치적으로 파산 위기에 있으나 우리의 살아있는 정신만 빼앗기지 않았다면 희망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일제 치하의 본국과 달리 해외 동포들은 너무 방심하는 면도 있음을 통론하면서, 본국에서 미주 동포들에게 거는 큰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던 선생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병이 재발했고, 결국 1941년 8월 30일, 4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광복의 아침을 보지 못하고 떠난 홍난파를 우리가 기리는 것은 그가 진정한 애국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유학 후에 세계 무대로 진출할 기회를 마다하고 식민지 조국의 울타리 밑에 핀 한 그루 봉선화이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많은 음악을 오늘도 즐겨 부르고, 그의 음악적 업적은 오늘날 우리가 음악 선진국이 되는 밑거름이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22일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 등 4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요밖에 배울 수 없었던 우리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말 동요를 100곡 이상 남겼으니, 음악가로서 홍난파의 애국 활동은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