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십경 유감

이정웅 2011. 9. 29. 17:12

 

 

 최근 대구시가 펴낸 대구 십경도(전면) 그러나 몇 군데 오류가 있어 유감이다.

 

 대구십경도 뒷면

 

 달성 서씨 문집에서 얻은 대구십경도 입암의 그림을 보면 삿갓처럼 그려져 있어 건들바위와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금호강과 팔공산

 

 건들바위 삿갓바위처럼 생기지 않았다.

 

신천과 침산

 

대구십경 유감

 

 

 

 

대구시에서는 500여 년 전 대구 출신 조선 전기 문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의 호)이 대구의 아름다운 10곳을 노래한 소위 '대구 십 영(또는 10경)을 '그곳에 가고 싶다'는 부제를 부쳐 새롭게 정리해 발표했다.

제1경 금호범주(今湖泛舟), 제2경 입암조어(笠巖釣魚), 제3경 구수춘운(龜峀春雲), 제4경 학루명월(鶴樓明月), 제5경 남소하화(南沼荷花), 제6경 북벽향림(北壁香林), 제7경 동사심승(桐寺尋僧), 제8경 노원송객(櫓院送客), 제9경 (公嶺積雪), 제10경 침산만조(砧山晩照) 등이다.

위치도를 넣고 시문을 현대감각에 맞도록 새롭게 번역하고 사진까지 곁들어 500년 전 사가가 거닐며 사랑했던 곳을 자세히 안내했다. 이 자료를 통해 5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대구의 모습을 일부나마 상상해 볼 수 있어 참으로 유익한 작업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사가정의 대구 십 영의 원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구읍지> <달성서씨 문집> 등에 등재되어 있으나, 시민 일반이 알기 쉽도록 위치와 번역문을 곁들어 게재한 자료는 1977년, 대구의 역사와 경관, 문화재, 전설 등을 망라한 책 <달구벌, 대구직할시>이다.

당시 대구 경승 편에 소개된 '대구 십 경'의 시문은 노산 이은상이 번역했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주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되나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지 않은 것 같아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2경 '입암(笠巖)'은 '군(郡)의 동쪽 2리 신천에 있는 '삿갓바위(경상도지리지)'라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구 대봉2동 732-38 건들바위(立巖,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잘 못 비정했고, 제5경 '남소(南沼)'는 두류공원 내 성당지라고 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은지 영선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부연했다.

그런데 대구시가 이번에 발행한 것은 30여 년 전에 간행된 <달구벌>의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시도하지 않은 채 입암은 종전 그대로 건들바위로, 남소를 성당못과 달리 '영선못'으로 비정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학술조사나 전문가의 견해는 아무리 그 내용이 정확해도 사견(私見)에 불과한 반면에 시의 자료는 비록 오류가 있어도 공식적인 자료가 되는 만큼 시정이 필요하다.

건들바위가 왜 대구 십 경의 제2경 입암(立巖)이 아니냐 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경상도지리지>에서 군의 동쪽 2 리, <대구읍지>에서는 '부(府)의 동쪽 5 리'라 하여 이(里) 수는 3리가 차이가 있으나, 두 책 모두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의 동쪽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남쪽인 건들바위와 방향이 우선 다르고 둘째는 입암은 바위가 삿갓(笠)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건들바위는 삿갓처럼 생기지 아니한 그냥 서(立) 있는 바위(巖)즉 입암(立巖)이며 셋째 사가정이 입암에서 금자라를 낚기 위해 낚시를 놓았다고 하는데 현재 건들바위는 선비가 한가롭게 앉아 낚시하기가 불가능한 구조이다. 또한 대구의 대표적인 사족(士族)인 달성 서씨 집안 문서 대구 십 경 위치가 표시된 <달성도>에도 입암은 삿갓처럼 그려져 있고 위치는 지금의 북구의 천주교 옥산성당 부근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부 시민들의 증언은 경대교 쪽의 신천 우안에 있었다고도 한다. 건들바위라는 이름은 서 있는 모습이 안정되지 못해 건들거리는 것 같은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제5경 남소가 영선못이 아니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대구 십 경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작품이다. 그는 1420년(세종 2)에 태어나 1488년(성종 19)에 돌아가신 분이다. 따라서 대구 십 경의 작품도 사가정 생존 시에 쓴 글이라면 15세기가 된다.

이 때 대구지역의 수실시설 즉 못이나 제(堤)의 축조여부는 <경상도지리지, 1425>,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책 어느 곳에도 영선지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영선지는 사가정 생존 시 구축된 못이 아님이 명백하다. 따라서 십 영의 무대가 될 수 없다.

다만 두 책 모두에 등재된 성당제(聖堂堤)는 이름도 현재 성당동과 같고 방향도 남서쪽이어서 1977년 <달구벌>에서 남소(南沼)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경상도속찬지리지 부남(府南) 즉 부의 남쪽 남산리(南山里)에 연꽃을 이르는 연화제(蓮花堤)가 있어 방향도 남쪽이고 이름도 연화(蓮花)인 만큼 남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산리가 지금의 남산동일대를 말하는 것인지 당시 못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전문가의 연구에 맡겨야할 것 같다.

20세기에 와서 사가정의 제목을 그대로 빌려(次韻) 또한 분이 대구 십 영을 남겼다. 작자는 역시 대구 출신으로 대구 판관, 청도군수를 지낸 경주인 일화(一和) 최현달(崔鉉達, 1867~1942)이다. 대구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화원 일대의 '상화대십경' 다사 일대의 '서호 십 경' '팔공산 일대의 '팔공산 십 경. 등 많은 10 경 시(詩)가 전해온다. 따라서 사가정 시만 정리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묶어 함께 정리할 필요도 있다.

 

 15세기 대구관내 못 현황

자료 간행년도 수리시설 비고
경상도지리지 1425년
(세종 7)
대구군 : 속현 :3개소
하빈, 수성, 해안현
0, 군내
성당제(聖堂堤), 불상제
0, 수성현
둔동제(屯洞堤)
0, 하빈현
0, 해안현
부제(釜堤)


경상도속찬지리지 1469년
(예종 1)
대구도호부
0, 부동
북산리; 송라제
0, 부남
감물천리 ; 성당제
남산리 ; 연화제(蓮花堤)
화산리 : 감물천3제
사리 :동리제
0, 부서
여아산리 : 율제
신방동리제
칠전동리제
지곡리제
0, 부북
검단리 : 불상제
무태리 : 정제
0, 부내
0, 수성현
동한산리 : 둔동제
광청동제
0, 현북
지지서리 : 장제
주곡리 : 병정자제
0, 하빈현
동말산리제
0, 현남
잉읍성제
0, 현북
굴천제
불회리 ; 사등제
0,해안현
동불회리 : 장동제
상향리 : 내리제
부곡제




 * 필자는 이 십경의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오고 있다.

최근 18세기 간행된 해동지도를 보고  입암(笠巖)은  종전의 주장처럼 옥산성당 부근으로, 남소(南沼)는 

현재 서문시장으로 비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