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능성구씨 무태 입향조이자 임란 공신 구회신

이정웅 2011. 9. 18. 19:51

 

 1690년(숙종 16) 구회신의 증손 구도징이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송은 구홍과 계암 구회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수정 정문

 화수정 강당

 화수정 현판

 송은 구홍의 사당 표절사

 표절사 현판

 능성구씨 무태 입향 400주년 기념비

동변동에 세운 세거비

 

 

능성구씨 무태 입향조이자 임란 공신 구회신

 

대구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능성구씨에 대해서도 그랬다. 무태 일대가 개발되기 전, 그때는 동화천을 가운데 두고 동쪽은 동변동과 서쪽은 서변동이라 불렀고 동 사무소도 각기 따로 있었다. 지금은 이 일대가 거대한 아파트단지로 변했지만 70~80년대는 대구에서 몇 안 되는 넓은 들이었다.

그 때 동변동에는 주로 능성 구씨들이, 서변동에는 인천 이씨들이 살았다.

그런데 본관지가 각기 전라도와 인천인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터를 잡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으로 발돋움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특히, 동변동에 세계유니버시아드선수촌을 건설할 때 강둑의 아름드리 왕버들을 보존 하도록 하는데 힘을 썼던 인연이 있어 더 애착이 가는 곳이다.

어느 날 등산인 전병견님으로부터 대구향교장의로 있으며 현재 기관지 '유림신문'에 향토선현들의 발자취를 연재하고 있는 구본욱님을 소개받아 무태의능성구씨 재사인 표절사, 화수정, 창포재 등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입향조는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 1564~1634)이다.

고려 벽상공신 삼중대광검교상장군 구존유(具存裕)가 공의 비조다. 이후로도 크게 이름난 분들이 많았는데 3대를 내려와 구예(具藝)는 중대광 판전의사사로 면성부원군이고 또 다시 2대를 내려와 구위(具褘)는 중현대부 소부윤(少府尹)으로 면성부원군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정공의 아들 구홍(具鴻)은 호가 송은(松隱)으로 벼슬이 삼중대광 문화시중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망국의 신하로 절의를 굳게 지켰다.

태조가 좌정승을 제수하며 3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죽은 뒤에도 명정에 조선이 내린 관직명을 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 후 돌아가심에 좌정승으로 썼더니 회오리바람이 불어 저절로 3차례나 찢어졌다고 한다.

다시 '고려 문화시중'으로 쓰자 그제 서야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대구의 표절사와 개성의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실기가 전한다.

문절공의 손자 송계 구익령(具益齡)이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종 조에 의성군사(군수)로 내려와 가음면 순호리에 정착 세거했다.

무태 입향 조 계암공은 아버지 종사랑 구대성(具大成)과 어머니 옥천 황씨 사이에서 1564년(명종 19) 의성 순호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시절 또래들과 놀 때도 무예를 즐겼으며 커서는 경사(經史)를 통독하는 한편 말 타기와 활쏘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어 임란이 일어나자 장검을 두고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피난가고 종사가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신하된 자 달아나 숨을 것이 아니라, 진실로 천명을 구할 때가 아닌가?' 라고 외치면서 장정을 이끌고 군위 의흥을 거쳐 팔공산에 있던 낙재 서사원 의병진에 합세하였다가 의병장 권응수가 지휘하는 영천성, 경주성 수복전투에 참전했다.

정유재란에서는 도체찰사 유성룡의 군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하여 벌인 울산 서생포 전투에도 참가했다. 이후 전란이 수습되자 일체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태에 정착했다.

1599년(선조 32) 임란 공훈으로 훈련원 첨정(僉正)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이 당파에 휩싸이면서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조용히 독서로 소일했다.

1606년(선조 39)관찰사 유영순 판관 김헌이 금호 아래 선사재에서 강학을 했는데 이 때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등과 함께 참가했다. 1609년(광해군 1)한강 정구가 무태 연경서원에 와서 강론할 때도 지역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참가했다.

공은 한 순간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매월 초하루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낙재, 모당, 괴헌 등과 더불어 강회를 열고 성현이 말한 의리의 정미함을 논하고 성명(性命)의 깊고 오묘함을 연구하였다. 1634년(인조 12)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다. 무태 표절사에 배향되었다.

 

공은 당대 낙재 서사원 등 지역의 많은 사림들과 교유하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선비로서의 삶에 모범을 보였으니 구연우, 구연간, 구연기, 구달서, 구재서, 구태서, 구종서, 구성서로 이어지는 소위 '구씨 8학사'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시문에 능하고 덕행이 높았다. 무태 구문들의 후예는 오늘날에도 경제계, 학계, 문화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