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비슬산 대견사 중창

이정웅 2011. 10. 29. 22:05

 

 

 대견사에 바라 본 저녁노을

 3층석탑과 저녁노을

 신라시대 창건 되었다는 대견사지

 대견사지 우물

 3층석탑

 드라마 추노 촬영지

 신라시대에 쌓은 축대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비슬산 대견사 중창

 

 

비슬산(琵瑟山)은 이름에 임금 왕(王)자가 네 개 들어있고 영험 있는 산이기 때문에 네 명의 왕이 배출될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에 절대 권력자인 왕이 태어날 수 없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왕에 비유한다면 대통령이 바로 왕일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대구에서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고향이 경북 구미지만 몇 년 전부터 선거구를 달성군으로 옮겼고 현재 여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박근혜 전 한라당 대표를 생각하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남록에 있는 대견사지(大見寺址)는 절을 지을 때 조성한 축대가 그대로 남아있고, 해발 1,000미터 정도로 높지만 샘물이 솟은 신비하면서도 전망이 좋은 곳이다.

저녁노을 또한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특히 삼층석탑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낙조의 붉은 빛이 낙동강 물에 반사되어 형언할 수 없는 색을 나타낼 때에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대구에는 15세기 서거정선생이 대구의 아름다운 열 곳을 골라 읊은 대구십영(大丘十詠)이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노원이나, 금학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소와 입암은 그 위치에 이설(異說)이 있어 현재로서는 대구를 대표하는 경승(景勝)이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구의 행정구역도 당시보다 확장되어 비슬산도 대구 땅이 되었다. 따라서 문제를 안고 있는 대구십영은 현실을 반영하여 새로 제정할 필요가 있다.

그 때 여건이 된다면 '대견사지의 낙조(落照)'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그런데 대견사지를 다시 생각할 수 기회가 우연(?)히 왔다.

달성군으로부터 대견사중창불사를 하는데 추진위원으로 위촉받았기 때문이다. 대견사의 낙조를 십영에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달성군에서 만든 자세한 자료를 보니 여느 사찰과는 다른 특별한 창건 내력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오랫동안 찾고자 했던 보당암이 바로 대견사라는 기록이었다.

삼국유사가 군위 인각사에서 간행되어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이라고 하여 일연스님에 대한 현창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우려 반갑지만 저자 일연스님은 태어난 곳은 경산이고 득도한 곳은 비슬산이다.

인흥사, 용천사 등은 이미 알려진 스님의 수행 처이나 보당암, 묘문암, 무주암 등은 어느 곳에 있는 암자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보당암에서는 무려 22년간이나 머물렀다는데 그 곳이 바로 수시로 찾아 낙조를 바라보며 즐겼던 대견사라고 하니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많이 퇴락했고 들보위에 책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산세가 대마도를 눌러 이 절을 지었다고 하였으며 초유사 김성일이 읽어보았으나 그 후 분실하고 절도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대장경을 만들어 몽골군을 물리치려고 한 것처럼 신라는 이절을 통해 왜의 발호를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중국의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던 중 세수을 하고자 할 때 세숫물 아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가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그곳에 절을 짓기 위하여 온 중국천지를 뒤지다가 마침내 신라에서 찾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비슬산 주봉에서 1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절을 지으니 당나라에서 보인 절이라하여 대견사라 하였다.' 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보당암이라고 했고, 1416년(태종 31)과 1423년(세종 5년) 경상도 현풍현 대견사의 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이름이 대견사(大見寺)로 바뀐 것 같다.

광해군과 인조 대에 중창이 있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서 대마도의 기를 누르려고 했던 것과 같이 일본인들에게는 기피 대상의 절이었던 것 같다.

1900년(고종 37) 이재인(李在寅) 스님이 고종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1897~1970)이 영친왕(英親王)에 봉해지자 그를 축하하고 수복을 기원했다.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는 동화사 말사로 있던 눈에 가시 같던 대견사를 마침내 폐사시켜버리고 그 사실을 관보에 게재해 오늘에 이른다.

달성군에서는 엄정한 고증을 거쳐 국보급 문화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특히 2014년은 달성군이 발족된 100년이 되는 해인만큼 이해에 맞춰 준공을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