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동의 유래와 칠성바위 이야기
북구 칠성2가 302번지 대구역 뒤편 한 공지에 바위 7개가 놓여 있다.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의 개석(蓋石, 덮개돌)으로서 원래 대구역의 서남쪽에 있던 것이다.
이 바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 정조 때이다. 1795년(정조 19)~1797년(정조 21)까지 2년여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태영(李泰永, 1744~1803)은 슬하에 7형제를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대구읍성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져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비록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 이상해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별이 떨어진 곳에 나가보았더니 과연 7개의 큰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그는 석공을 불러 동쪽에 있는 바위부터 희갑(羲甲), 희두(羲斗), 희평(羲平), 희승(羲升), 희준(羲準), 희조(羲肇), 희장(羲章, 훗날 羲華로 개명) 등 모두 일곱 명의 아들 이름을 새겼다. 『대구의 향기, 대구직할시 1982 그러나 각자(刻字)의 숨, 희(羲) 자를 옳을 의(義)자로 오역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후 일곱 아들이 장성함에 따라 얼굴이나 성품이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갔다. 즉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3개의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3명의 아들은 자라서 무관이 되었고, 깨끗하고 반듯하게 생긴 3개의 바위에 이름을 새겨진 3명의 아들은 문관이 되었다. 그리고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쓴 아들은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앞서 소개한 책) 그러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과 송은석의 ‘풍경산방’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이런 전설과 달리 맏이 희갑(1764~1847)은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정헌(正獻)이라는 시호를, 다섯째 희준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예조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로 받았으며, 여섯째 희조(1776~1848)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을 지냈고 둘째 희두(1768~1854) 증직(贈職) 좌찬성과 넷째 희승(1774~1854) 진주목사는 생원시에 셋째 희평(1772~1839) 황주 목사는 진사시에 급제하여 여섯 명의 급제자를 배출했고 막내 회장(희화)도 부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7형제 모두가 문관으로 크게 이름을 빛낸 분들이다.
그 뒤에 둘째 아들 희두가 선산 부사가 되어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이곳을 찾아 주변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가운데 의북정(依北亭)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자는 퇴락해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소나무는 잘 자라 명소가 되었는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아들 놓기를 간절히 비는 곳이 되었다.
오늘날 칠성동(七星洞)의 이름은 이 바위로부터 비롯되었다. 1973년 시민회관을 신축하기 위해 발굴 조사하였으나 별다른 유구는 발견하지 못했으며 시에서는 시민회관 화단에 옮겨 보존해 왔다.
그 후 마을의 유래가 된 칠성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민의 요구가 있어 이에 시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1998년 마침내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이 감사의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다면 이 고인돌 역시 대구의 수많은 고인돌이 땅에 묻힌 것과 같이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감사는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 감사는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1772년(영조 48)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였다. 1778년(정조 2) 부교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광주 부윤, 장단 부사를 거쳐 1793년(정조 17)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웅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재직 중 묵은 토지의 등급을 낮추어 조세의 부담을 덜어주고 농사를 장려했다. 또한, 이수인, 우재악, 김태익, 이정국, 정위 등 영남의 숨은 인재를 발굴해 천거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곤양군 (지금 사천군 곤양면)에 있는 봉산(封山)에 2,500그루의 소나무가 도벌된 것에 대해 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장계를 올렸는데 군수 정문재는 정배(定配,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일정 기간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는 형벌)되고 전 삼군 통제사 이득제와 관찰사 이태영은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감영이 있는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현장을 신속히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정도 도벌이라면 군수는커녕 면장도 파직당하지 않고 담당자만 겨우 징계를 받는 오늘날의 실정을 감안(勘案)하면 조선 후기 국가의 엄격한 산림 보호 정책의 한 단면을 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곧 복직되어 대사간, 공조 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지방관의 꽃이라고 하는 평안도 관찰사도 지냈다. 현재의 대구역 뒤는 너무 외진 곳이라 한적하기 그지없고,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시대상을 반영해서 그런지 찾는 이조차 없다. 바위의 배치 역시 북두칠성과는 거리가 멀어 본래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다.
어렵게 보존된 귀중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고, 새로운 주거지로 각광(脚光) 받는 칠성동의 유래가 된 향토 사료인 데 비해 대접이 적절하지 못해 아쉽다. 문화재로 지정하여 선사시대 묘제(墓制)를 살필 수 있게 하고, 왜 칠성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는지 알게 했으면 좋겠다.
칠성동의 큰 중심 공간을 별도로 공간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북구 청사 내 일정한 곳을 아름답게 꾸며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옮겨 놓았으면 한다. 대구에 미술관을 짖고자 했던 세계적인 화가 이우환의 작품에도 자연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큰 돌은 굳이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인공조형물보다 아름답다.
7 형제 중 칠성바위의 영험(?)으로 대과 급제자 3명, 소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한 이곳은 이태영 가문에서도 알뜰하게 보듬을 가치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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