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漆谷) 이름 되찾기
들어가는 말
대구시민들에게 칠곡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일부 시민들은 군청을 왜관에 두고 있는 칠곡군(漆谷郡)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일부 시민들은 팔달교 건너 북구 관문, 태전1.2, 구암, 관음, 동천, 국우, 읍내동 일대를 칠곡이라고 말할 것이다.
칠곡(漆谷)이라는 한 지역의 땅이름을 두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원래지명(구 칠곡이라고 부르자)을 낳은 구 칠곡지역은 급속한 도시화로 본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반면에 기초자치단체의 하나인 칠곡군은 새로운 칠곡(신 칠곡으로 부르자)으로 자리 메김 되어 위상이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 칠곡의 이름은 그 역사가 무려 1000여 년이 넘는 반면에 신 칠곡은 100여 년에 불과하다.
11세기 오늘날 북구 읍내동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팔거현으로 불렀고 별칭을 칠곡이었으며 왜관을 군청 소재지로 두고 있는 신 칠곡은 19세기 말에 칠곡군이 발족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러한 상태가 1세기 정도 지속되다보니 이름에 대한 혼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즉 신 칠곡으로 가야할 우편물이 구 칠곡으로 배달되는가 하면, 구 칠곡으로 와야 할 우편물이 신 칠곡으로 배달되고, 심지어 칠곡군청이 주관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외지사람이 구 칠곡지역에 있는 칠곡나들목을 이용했다가 지각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는 종전에 시행되었던 군명(郡名) 즉 이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더 걱정스러운 문제는 지명의 상실이 사무 착오 등 불편사항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온 토박이들의 미풍양속과 문화마저 되찾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극히 예외적으로 경북대학교가 병원을 새로 지으면서 칠곡경대병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이외에는 주민들 스스로 이곳을 강북(江北)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옻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 점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확대될 것이다. 최근 개청한 경찰서 명칭 '강북경찰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명은 그 지역의 지리, 지형적 특징은 물론 역사와 문화, 전통이 응축되어 있다. 행정적 편의성만으로 두부 자르듯 획일적으로 잘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편익과 정체성이 고려되어야 하는 점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칠곡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향후 자치구로 독립될 경우 붙여질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 염두를 두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새로 지어질 주민자치센터나 초. 중등학교의 이름도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이름을 붙여야 한다.
아파트 숲으로 변한 칠곡
칠곡의 연혁
칠곡은 신라 초에는 북치장리(北恥長里)라고도 하고 인리(仁里)라고도 했다. 35대 경덕왕(742~765)이 군현제도를 실시할 때 수창군 소속 4개현의 하나로 팔리현(八里縣)이라고 했다.
1018년 (고려 현종 9)에 소속이 성주목으로 변경되면서 팔거현(八居縣)이 되었다가 그 후 거(居)자가 거(莒)자로 바뀌어 팔거현(八莒縣)으로 불렀다.
이 때 <경상도지리지>에 의한 팔거현의 관할지역은 동쪽은 대구군 경계 정현(鼎峴) 즉 솥고개까지, 5 리 100보(步), 남쪽 역시 대구군과 경계지점인 금호(琴湖) 즉 금호강까지 10 리 270보, 서쪽은 약목현 경계지점인 증연(甑淵)까지 25 리, 북쪽은 인동현 경계 소야현(所也峴) 까지 20 리 327보 안이었다.
347가구에 남자 1,481명, 여자 1,539명 도합 3,020명이 살았으며 가구 당 인구는 9명 정도였다.
토박이 성 씨는 도(都), 현(玄), 임(任), 전(田), 변(卞)씨 등 5개, 외지에서 들어 온 성씨로 배(裴), 임(林) 2개 성씨 등 모두 7개 성씨가 주류를 이루었다. 저수지 또한 2개소였는데 소리제(所里堤), 사라제(沙羅堤)이다.
'칠곡(七谷)'이라는 이름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사>와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팔거현의 별호(別號)로 칠곡이라 불렀다니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이다. 물론 그 때도 성주목 관할이었다.
칠곡(七谷)이란 이름은 가산에서 유래되었다. 가산은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정(山頂)에는 나직한 7개의 봉(峰)으로 둘러싸인 평정(平頂)을 이루고 골짜기는 사방 7개로 형성하고 있어 부쳐진 이름이고 언제가 칠(七)자가 칠(漆)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임란 후 1593년(선조 26) 팔거현 구지에 경상 감영이 설치되어 1596년(선조 29)까지 존속하가 대구(현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안동으로 옮겼다가 1601년(선조 34)에 대구(현 경상감영공원자리)로 다시 옮겨왔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 5000명이 팔거에 주둔했다.
그 후 1640년(인조 18) 팔거현이 성주 속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기관인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관아(官衙)를 가산산성 내에 두었다.
그러나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데 따른 민원이 많아 1819년(순조 9) 179년 만에 평지인 팔거현 옛터 지금의 북구 읍내동일대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할 때도 칠곡군은 경산군, 인동군 등 다른 23개 군과 함께 대구부(大邱府)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96년(고종 33) 대구부에서 분리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 군청을 왜관으로 옮겼다. 1980년 칠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나 1981년 7월 1일 대구시 역시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칠곡읍 전 행정구역을 편입하여 북구 칠곡출장소를 두었다.
이 때 면적은 47. 89km2, 가구 수는 6,207호, 인구는 29,191명이었으며 법정동은 태전, 구암, 관음, 사수, 금호, 팔달, 매천, 동천, 읍내, 학정, 동호, 국우, 도남 등 13개동이었다.
1996년 칠곡출장소를 강북출장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98년 폐지되면서 관문동, 태전1동, 태전2동, 구암동, 관음동, 읍내동, 동천동, 국우동 등 8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살펴볼 때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7세기부터 1996년 칠곡출장소가 폐지될 때까지 300여 년 간 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긴 시간 대대손손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록 대구시 북구에 편입되어 있지만 칠곡이라는 이름에 대한 향수가 매우 크다.
칠곡이라는 이름을 오래동안 지켜온 칠곡향교
지명의 혼용(混用)사례
칠곡이 법률상으로 경상북도의 군 이름으로 정식 명명되었기 때문에 공부상 칠곡이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그러나 칠곡 토박이들의 정서에는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름만 대구의 북구의 무슨 무슨 동이지 그들의 마음의 고향은 칠곡이다.
따라서 많은 주민들은 옛 이름 칠곡을 고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첫째, 옛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경우 : 칠곡향교, 칠곡초등학교, 칠곡농업협동조합 칠곡중학교, 칠곡나들목, 칠곡중앙대로, 칠곡가톨릭병원, 칠곡재활용센테, 칠곡경대병원, 칠곡성당, 칠곡연세치과병원, 칠곡치안센터 등 칠곡 고수하는 파 들이다.
둘째, 오해에서 비롯된 이름을 선택한 경우 : 옻골동산, 옻골신문, 옻골축제 등이 있는데 이는 칠곡의 칠을 옻나무 칠(漆)자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 이곳을 옻나무골로 보고 지은 것으로 생각되나 옻나무가 많았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셋째, 기타 지리적 특징을 감안해서 부르는 경우 : 대구강북고용센터, 강북청년회, 강북중고가전, 강북고등학교, 강북용양병원, 구수산도서관, 관문동 등이다.
강북이라는 말은 금호강 북쪽이라는 뜻이나 이 역시 금호강의 정북(正北)은 오히려 무태가 되고, 구수산은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구수산에서, 관문은 이곳이 대구 북서부의 관문(關門)이라 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되나 관문으로 치면 대구의 동서남북 다 해당되는 이름이고 실제로 남구에 관문시장이 있을 만큼 특별히 칠곡일대만 관문으로 부를 이름은 아니다.
이 이외에도 대구칠곡청소년봉사회, 대구칠곡우체국, 대구칠곡교회 대구칠곡신협 농협중앙회 칠곡지점 등 칠곡이라는 이름 앞에 대구를 붙여 칠곡군과 차별화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무원칙한 작명의 혼란 수습은 빠를수록 좋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칠곡 이름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경상북도와 대구시가 합리적으로 조정해 양 지역이 공동 번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칠곡군 역시 주민의 중지를 모아 지역의 정체성에 맞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개교 100년을 자랑하는 칠곡초등학교
맺는말
읍지에 의하면 칠곡 사람들은 '검소함을 즐겨하고 순박하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함을 숭상하였다'고 했다.
한 때 경상도 전 고을을 다스리는 감영(監營)이 설치되었던 곳이고, 성리학자 한강 정구선생이 만년을 보낸 유서 깊은 곳이며 21세기에도 대구광역시의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급속한 개발로 인하여 드넓었던 팔거들은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조상들이 물려준 이름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이름을 되찾거나 팔거(八莒) 등 역사성이 있는 새로운 이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한 편의 글을 읽고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 그대로 옮겨 마무리를 할까 한다. 때는 1997년이었다.
당시 지역의 유명일간지 영남일보사에서는 조선시대 서울과 부산을 잇던 길을 '영남대로일천리'라는 제목으로 연재 했다. 그 때 칠곡 일대를 취재하면서 특별취재팀이 남긴 뒷이야기이다.
'나라가 없어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했던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자리했던 옛 칠곡면지역(현 팔달교 넘어 대구시 북구지역)을 취재하면서 칠곡면의 역사가 어느새 칠곡면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팔달교를 넘어서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숲만이 가득할 뿐, 칠곡도호부의 옛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사적은 거의 없었다.
취재팀은 옛 칠곡면지역의 영남대로를 취재하기 위해 우선 왜관의 칠곡군청을 찾았으나, 지난 81년 대구시로 편입돼버린 옛 칠곡면의 역사에 대해서는 사료나 역사물이 거의 없었다.
칠곡군청으로서는 조선시대 칠곡도호부의 행정중심지였던 읍내동이 대구시로 편입돼버리자 향토사발굴주체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 대구시 북구청을 찾았더니 북구청은 불과 16년 전까지만 해도 칠곡군 땅이라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옛 칠곡의 역사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 셈이다. 대구시의 역사도 아니고 칠곡군의 역사도 아닌 두 지방자치단체의 <미운 오리 새끼>가 돼버린 꼴이라고나 할까. 아파트만이 옛 역사를 깔고 앉아 주인으로 남은 셈이다.
옛 칠곡면은 사라지고 대신 조선시대 일본인들의 교역 장소이자 낙동강 변 허허벌판일 뿐이었던 왜관(倭館)이 한일합방을 겪으면서 일인들에 의해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칠곡면의 역사는 외면 받고 왜관이라는 지명은 아직도 학교와 기관 등 각종 관공서문에 떳떳이 붙여져 있는 현실이 왠지 서글프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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