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의 수호신 연구산 돌거북

이정웅 2011. 12. 30.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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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수호신 연구산 돌거북

 

대구시 중구 봉산동 230-1번지 제일중학교 자리가 옛날 산이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흔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1945년 4월 20일 이전 전신인 대구여자상업학교가 개교하기 전만해도 시민들이 즐겨 찾던 산이었다.

이름도 다양해 월견산(月見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오포산(午砲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전자는 시가지 내에 우뚝 솟아 정월대보름 달맞이 하던 산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시계가 널리 보급되지 아니하였던 일제강점기 점심시간을 알리는 대포를 이곳에서 쏘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바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이다.

 

1432년(세종 14)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 대구군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산(鎭山)은 연구산(連龜山)이다.【속담에 전하기를, “돌거북[石龜]을 만들어서 산등성이에 간직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게 하여 산기(山氣)를 통하게 한 까닭으로, ‘연구산’이라고 이른다.”고 한다. 】

 

이와 같은 내용은 같은 시대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서는 '맥(脈)'을, 뒤늦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맥(地脈)'을, <대구읍지>에도 역시 '지맥(地脈)'을 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이곳은 앞산과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달구벌의 맥이 금호강으로 인하여 끊어진 것을 선조들이 일부러 돌로 거북을 만들어 묻어 맥을 이은 곳이다.

일제강점기 지표조사에 의하면 이 돌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라고 하니 무려 3,000여 년 전에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비방을 해 놓은 성소(聖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우리 고장이 배출한 문신(文臣) 서거정이 노래한 대구 십 경중에서 제3경으로 '구수춘은(龜岫春雲)'이라는 시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구잠은은사오잠(龜岑隱隱似鰲岑) 거북 뫼 엄전할 사 삼신산만 같을 시고

운출무심역유심(雲出無心亦有心) 거기서 나오는 구름 무심한 듯 유심하이

대지생령방유망(大地生靈方有望) 온 백성 다 바라거니

가능무의작감림(可能無意作甘霖) 단비 아니 주시리.

 

이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돌거북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는커녕 안내판이나 자료마다 해석이 달라 선조들이 물려준 귀중한 유산을 홀대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표적인 사례가'거북바위'를 두고 '자라바위(鰲)'라고 하는 점이다.

산 이름도 '연구산(連龜山)이고, 시의 제목에서도 구수(龜岫) 라고 했으며 실제 바위가 생긴 모습도 거북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왜 거북이라 부르지 않고 자라라고 낮춰 부르느냐 하는 점이다. 자라와 거북은 물과 바다라는 서식하는 환경도 다르지만 품격도 다르다. 즉 사슴이나 학과 더불어 십장생에 거북은 포함되지만 자라는 포함되지 않는다.

혹자는 앞산이 불꽃형상을 하고 있어 대구에는 불로 인한 사고가 잦은 형국이기 때문에 불과 상극인 바다에 사는 거북을 묻어 이를 제압하려고 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상인동의 가스폭발사고와 지하철중앙로역화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전국의 내 노라 하는 지관(地官)들로부터 선조들의 비방 -돌로 거북을 만들어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를 북쪽으로 묻어 놓은 것-을 소홀히 해서 일어난 참사라는 지적이 많았다. 즉 일제가 학교를 지으면서 거북의 머리를 동쪽으로 꼬리를 서쪽으로 방치했었다.

이후 2003년 11월 19일 시민단체인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풍수전문가 김기선 교수의 자문과 대아알미늄(주) 이영석 사장의 경비지원으로 원래 위치로 바로 놓았다.

이후 영험(?)이 계속 유지되어 그런지 큰 사고가 없었다. 소방본부가 팔공산에 시민안전테마파크를 조성하면서 안전의 상징인 이 돌거북을 그곳으로 옮기려고 조심스레 추진했으나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했고, 중앙로를 대중교통전용도로로 정비하면서 중앙로역부근에 역시 실물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설치했다.

이런 점에서 2011년 가장 성대한 대회로 치렀다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스코트가 거북이 아니고 삽살개였던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대구시가 많은 일들을 그렇게 추진하듯이 전문가가 참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현재 제일중학교 교정 돌거북 옆에는 안내판을 잘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일부 표현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즉 안내판의 "앞부분의 자라는 -거북으로, 첫째항목 자라를 닮아-거북을 닮아, 둘째항목 수도산(修道山)-수도산(水道山), 셋째항목 화산지대여서-불이 잘 나는 형국이어서, 넷째항목 1980년 -1908년, 예제단(禮祭壇)-여제단(勵祭壇), 구암춘운(龜岩春雲)-구수춘운(龜岫春雲), 마무리하는 글 중에서 자라바위-거북바위" 로 고쳐야할 부분이다.

다시 한 번 이 돌거북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서울시의 상징물이 해태, 강원도가 반달곰이듯이 대구의 상징동물도 거북을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최하 말단기관인 현(縣)에 불과했던 대구가 오늘날 260만 명을 수용하는 대도시로 발전한 배경에는 3,000여 년 전 후손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돌거북을 만들어 끊어진 맥을 잇게 한 선조들의 후광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