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수목원이 시민들의 승승장구와 대구시정이 시민과 함께 동고동락 하기를 기원하는 흑용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대구지역에 있는 용에 관한 전설을 뽑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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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의 용에 관한 전설
0, 용골
동구 상매동의 뒤 능천산에 인접한 곳에 높이 80m, 길이 200m정도의 수직절벽과 계곡이 있다.
마치 용의 모양을 하고 있어 용골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 대장으로 온 이여송이 산세가 수려하여 큰 인재가 날것이 두려워 정기를 끊기 위해 혈(血)을 잘랐더니 3일간 붉은 피가 흘렀으며 짐승들도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후 언젠가 절개된 산일부가 상매동 능선과 합쳐져서 평탄한 분지로 되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좋은 땅, 복이 있는 땅이라 하여 복득듬(福得듬), 또는 북득듬이라고 한다.
0, 와룡산
하늘나라에서 미움을 받은 용이 장군의 칼에 맞아 떨어져 누워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와룡산이라고 한다. 또한 용이 승천하려고 하는데 지나가든 아녀자가 '산이 움직인다'하고 방정맞은 소리를 하자 승천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 누워 와룡산이라고 한다.
0용지봉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옛 날 어느 때 큰 홍수가 나서 산이 물에 다 잠기고 용 한 마리만 피할 정도만 남았는데 용이 이곳에서 피했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가 홍수를 피했던 용의 뿔과 같다하여 용지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0 육룡소
가창면 주동 158번지 부근 개울가에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서있는데 이 바위 밑을 육용소라고 부른다.
아득한 옛날 이 좁은 개울가에 큰 바위가 가로놓여 있고 그 밑에는 깊은 소가 있었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오면 이 가로 놓인 바위로 인해 물이 범람해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먹구름이 모여들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번개가 치더니 이 소에 머물던 용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한 마라씩 차례로 여섯 번째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가 스쳐 개울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를 치자 소가 헐려버렸다. 그 후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농사가 피해가 없었다.
지금 소의 흔적이 없으나 큰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는 이곳을 육용소라고 부른다.
0, 용재산
하빈면 무릉동에는 용이 승천할 때 고리를 끈 흔적이 있어 이름이 붙여진 용재산이 있다.
계곡에는 깊은 소가 있어 본래 옥황상제의 시종무관이었던 용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인물이 준수하고 성품이 호방하여 옥황상제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하루는 옥황상제가 잔치를 벌였다. 춤과 노래로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옥황상제는 좌중을 향해 '여러분 내가 평소 자랑하고 싶던 것이 있으니 모두 봐 주시오' 라고 했다.
모두들 궁금해 하며 빨리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옥황상제는 시종을 불러 칼춤을 추게 했다. 시종의 현란한 칼춤솜씨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그 때 함께 구경하던 한 천사가 시종의 춤 솜씨와 준수한 용모에 반하고 말았다. 잔치가 끝나자 시종과 선녀는 몰래 먼 별나라로 도망갔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둘을 잡아서 용재산에 귀양을 보냈다.
용으로 변한 시종에게 이르기를 '인간을 위해 열 가지 착한 일을 하면 귀양을 풀고 선녀와 혼인을 허락해 주겠다고 했다.' 시종은 용소에 머물면서 9가지 좋은 일을 하고 이제 1가지 좋은 일에 대한 기회만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해 큰 가뭄으로 마을 주민들이 용소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 때 용은 자신의 신통력을 발휘해 비를 내렸다. 그 때 용도 함께 비를 타고 꼬리를 끌며 승천했는데 그 때 꼬리를 끈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0, 용지덤불
도동에 가뭄이 들어 동네사람들이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느 동민이 샘 하나를 발견했다. 그 샘에 3일간 목욕재계하고 낙동강 변 용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그 때 강 속에서 용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는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쏟아졌다. 그 후 용이 승천한 절벽 옆 숲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랐는데 그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듯하여 그 나무가 있는 숲을 용지덤불이라고 했다.
0, 용소와 용비늘 무덤
유가면 용동에서 동쪽으로 1km 떨잔 비슬산 기슭에 있다. 아주 오랜 옛날 가뭄이 심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이 때 땅 속에 있던 용이 승천하면서 땅이 갈라졌는데 이곳을 용소라 하고 그 때 떨어진 용의 비늘을 묻어 준 곳을 용비늘무덤이라고 한다.
용소는 명주실 두 꾸러미가 들어가도 더 들어갈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후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고 나서 여자들이 산에 올라가서 돌을 굴려 이곳에 던져 넣고 속옷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전날 던진 돌이 이튿날 다시오면 물밖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이 골짜기를 용바위골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용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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