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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심원정(心遠亭) 원림(園林)
원림(園林)은 “자연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삼은 것으로 그 안에 정자를 짓기도 하고 나무나 꽃을 심어 정원을 꾸미기도 한다.”고 정의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공으로 꾸민 정원과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은 보길도의 세연정,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서석지를 빼면 영남지방에는 이렇다 할만한 원림이 없고 혹 있다고 하더라도 규모가 소쇄원이나 세연정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영남은 조선조 어느 지역보다 선비들이 많은데도 왜 이렇다 할 원림이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규모가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들도 좁은 지형적인 차이일까 아니면 선비들이 지향하는 학문과 자연을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문화의 차이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칠곡 동명 구덕리 송림사 앞에 있는 아주 소박한 그렇지만 의미 있는 한 원림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자의 주인은 창녕인 기헌(寄軒) 조병선(曺秉善, 1873~1956)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의 문인이며 문집으로 『기헌집(寄軒集)』 등을 남긴 유학자다. 공은 만년에 이곳에 들어와 심원정을 짓고 심원정수석기(心遠亭水石記, 번역, 조수학)를 남겼는데 대강은 다음과 같다.
“내가 송림에 이사 온 후로 여가가 많아서 자주 사람들과 어울려 여기에 노닐면서 그곳의 수석을 좋아해 장차 장수(藏修, 학덕을 닦아 간직함)할 뜻이 있었다. 금 년 (1937) 봄 아들 규섭에게 정자를 짓게 하여 가을에 완수했다. 마루는 이열당(怡悅堂)이라 했는데 도연명의 시 '편히 즐기다.' 에서 취하였고 방 암수실(闇修室, 몰래 닦다)은 주자의 말인데 옛날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써서 내게 준 것이다.
집 위류재(爲留齋)는 주자의 시 산수위류(山水爲留)란 말에서 따온 것으로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누각 정운루(停雲樓)는 도연명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친구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이 모두를 합쳐서 편액을 심원정이라 했는데 역시 도연명의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 이란 말에서 취한 것으로 '그윽이 살면서 제 뜻을 터득했다.' 란 뜻이다.
정각의 집터에는 그 모양을 따라 바위에 새기기를 귀암(龜巖)이라 하였고 정각 앞 절벽은 모두 세 굽이가 졌는데 첫 굽이인 성석대(成石臺)에는 앉아서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라 새기기를 '양망대(兩忘臺)' 했으니 조대사(釣臺詞)에 있는 말(두 가지 번뇌를 다 잊음)이다. 둘째 굽이에는 은병'(隱屛)'이라 새겼으니 주자의 무이구곡 제5봉(실제 무이도강에서는 7곡) 이름에서 취한 것으로 은거병식(隱居屛息, 은거하면서 소리를 죽이고 숨을 쉼)이라는 뜻이다. 셋째 굽이는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논에 물을 대는 봇물을 끌어와서 폭포를 만들고 '은폭(隱瀑)'이라 새겼으니 그 뜻은 논에 물을 댈 때는 쉬기 때문이다. 정자 앞에 넓적한 바위가 누워 있어 받쳐서 반듯하게 하고 '성석(醒石)'이라 새겼으니 잠이 올 때면 와서 여기에 앉아 깨운다는 뜻이다. 정자 동쪽 움푹진 곳에 터진 쪽을 막고 물을 끌어와서 연을 심고 '군자소(君子沼)'라 새겼으니 주렴계의 말에서 취한 것이다. 물이 넘치는 곳에 남아 있는 구덩이를 막아서 목욕탕을 만들고 '탕지(湯池)'라고 새겼다. 연못 위쪽에 바위를 파서 우물을 만들고 주위에 구기자를 심고 돌을 세워서 '기천(杞泉)'이라 새겼다. 그 위에 온갖 꽃을 심고 돌을 세워 '방원(芳園)'이라 세 겼다.
이곳에는 돌이 많아서 쓸모없이 오래 버려진 땅이 있는데 그중 빈 곳에는 근처 밭에서 버린 돌자갈이 쌓여서 작은 언덕이 되어 있는 것을 흙을 덮고 좋은 나무를 심었는데 그중에서 느티나무가 가장 많으므로 돌을 세우고 '괴강(槐岡, 현장에는 회화나무가 있다. 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모두를 일컫는다.)'이라 새겼다. 괴강 옆에 통로가 있는데 양옆에 돌을 세우고 '석비(石扉, 돌로 된 사립문)'라고 새겼다. 그 옆에 등나무를 심고 돌을 세워 '동취병(東翠屛)'이라고 새겼으니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괴강 아래에 도랑을 파서 연못물이 돌아 흐르게 하고 도랑 양 입구에 돌을 걸쳐서 다리를 만들고 각각 돌을 세워 '천광(天光)' 및 '운영(雲影, 주자의 속칭 도통했다는 시)교'라고 했는데 여기를 지나 방원(芳園)으로 통한다.
방원과 연못 동쪽에는 길게 둑을 쌓아 보호하고 좌우에 버들을 심고 돌을 세워 '유제(柳堤)'라고 새겼다.
유제의 동쪽에 우뚝 솟은 바위는 웅크리고 앉아서 충돌하는 냇물을 감당해 내고 있으므로 '지주(砥柱, 예부터 절개를 상징함)'라 새겼다. 그 남쪽에 바위 기슭이 넓게 펑퍼짐하게 펼쳐진 반석이 있는데 '동반(東槃)'이라 새겼으니 정자 동쪽에 있는 고반(考槃, 은퇴한 후에 풍류를 즐기는 일)이란 뜻이다. 반석 밖에 큰 돌이 수중에 누워 있는 데 그 위에 몇 사람이 앉을 수 있고 냇물이 불어나면 잠기곤 하므로 '반타(槃沱, 반석에 물이 흐름)'라고 새겼다.
정자의 서쪽에는 별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높이가 남쪽 벼랑보다 훨씬 낮으나 셋째 굽이의 은폭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것을 '서대(西臺)'라고 새겼다. 그 위편에 오솔길이 있는데 시내를 따라 정자로 들어오는 길이다. 나무를 심고 넝쿨로 덮고 돌을 세워 새기기를 '서취병(西翠屛)'이라 했다. 서대의 서편에도 석벽이 있는데 북편에 늘어서서 냇물을 온통 받아서 뒤엎고 꺾어서 다시 아래로 흐르게 하므로 수구암(水口巖)이라 새겼는데 정자 누 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니 모든 곳에 다 절구(絶句) 한 수씩을 읊어 기록했는데 정자 안에서 5수, 정자 밖에서 20수를 얻었다.
비록 손을 보기는 했으나 다 자연의 지세를 따라 이룩하였고 억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 밖에 아침저녁으로 모양이 달리 보이고 사시에 따라 경치가 다른 것은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저자가 언급했지만 정자 이름 심원(心遠)은 도연명(陶淵明)의 시 “음주(飮酒)’에 “사람들 사는 틈에 초가집 짓고 살아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도다. 묻노니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心)이 머니(遠) 머무는 땅 또한 자연히 외지리라.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라에서 따온 것이다. 비록 속세에 있지만 은둔자로 살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마음을 멀리 두면 비록 소란한 마을 한가운데 있더라도 여유롭고 한가하게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인이 가고 없는 지금 주변은 유원지화되고 아름다운 정자는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다. 기헌 선생이 건물 밖에 이름을 부처 노래한 20곳 중 제6 영 귀암(龜巖), 제7 영 성석(醒石), 제8 영 은병(隱屛), 제9 영 양망대(兩忘臺), 제10 영 은폭(隱瀑), 제11 영 군자소(君子沼) 제12 영 기천(杞泉), 제13 영 천광 운영교(天光雲影橋), 제14 영 방원(芳園), 제15 영 괴강(槐岡), 제16 영 유제(柳瑅), 제17 영 석비(石扉), 제21 영 반타석(盤陀石), 제23 영 동취병(東翠屛), 등 15곳은 보존되고 있으나 제19 영 동반(東槃), 제22 영 서대(西臺), 제25 영 수구암(水口巖) 3곳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제18 영 탕지(湯池)는 시멘트로 메워진 상태이며, 제24 영 서취병(西翠屛)은 토지를 매입해야 원래 모습으로 복원(復元)이 가능하다.
기헌 이후에도 심원정은 지역의 선비들에 의해 꾸준히 시 창작과 교유 장소로 활용되었다. 1963년 4월 가남시사(架南詩社) 회원 조규수(曺圭秀) 등 11명, 1965년 조창환(曺彰煥) 등 24명이, 1971년 역시 조창환 등 28명, 1972년 조규택(曺圭澤) 등 25명이 시회(詩會)를 열었다. 그 후 집안 사정으로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이 정자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필자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매일신문 자매지 <주간매일>에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을 연재할 때였다. 대구시에 같이 몸담았던 한영기님이 주변 바위에 글씨가 쓰여 있는 정자가 송림사 앞에 있는데 한번 가보자고 하여 따라나섰다가 “창녕인 조병선의 원림(園林)과 칠곡 구덕리 소나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2012년 3월, 8일자) 이를 본 후손들이 신문을 복사해 문중 회의에 부쳐 이후 기헌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2014년 한국내셔날트러스트의 “꼭 지켜야 할 문화유산부문”에 선정되고 “심원정고택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정자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보존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부지가 송림사 소유로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헌 선생 생존 시 상당한 토지를 송림사에 보시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면서 그에 상응하여 정자가 안고 있는 부지를 교환해 줄 것을 협의하고 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기념사업회 조호헌 사무처장이 복원, 토지문제와 더불어 문화재지정, 활용방안 등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필자가 신문에 내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 그지없다.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심원정 편액의 글씨가 서예가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 1874~1947)의 작품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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