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지강 이승연을 기리기 위해 1932년 후학들이 건립한 운공서당
운곡서당 중건기
묘갈명 1973년 창년인 성낙훈이 비문을 짓고 후손 이능환이 글씨를 썼다.
운곡서당현판
회산 박기돈의 지강유거
운곡서당 안내판
지강 이승연
수변경관이 아름다운 명소 운암지를 지나 함지산을 오르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 쪽으로 미륵사가 보이고 그 바로 옆 동쪽 즉 구암동 367번지에 운곡서당(雲谷書堂)이 있다.
애국지사이자 성리학자인 지강(芝岡) 이승연(李昇淵)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932년에 건립되었다. 공은 본관이 광주(廣州)로 1861년(고종 12) 칠곡군 칠곡면 지자리(현, 대구시 북구 국우동)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를 통달했고 이후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유학의 기본은 물론 천문, 지리, 의학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로 박식했다고 한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지(智), 인(仁), 용(勇)을 겸비해 당시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이 공을 초청에 시국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나라를 강제합병하자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3년 7월 만주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경비조달을 위해 국내에 온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고, 1914년 9월에도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온 황종언(黃鍾彦), 이형국(李衡國) 등과 20만원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1915년 2월 채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르고 1919년에는 유림의 파리장서운동을 적극지원하여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약을 처방하여 주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내놓고 중국의 신해혁명 지도자 손문(孫文)과도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1933년 향년 73 세로 졸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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