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 양희지선생을 배향한 오촌서원(대구시 수성구 파동)
오천서원 현판
대봉 양희지 선생의 위패를 모신 오천사
중화양씨 족보
대마도 원통사
원통사 입구에 있는 통신사 이예공적비
문무를 겸비한 조선의 명신 양희지와 대구
대구읍지의 인물조에는 대봉 양희지(楊稀枝, 1439~1504)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놓고 있다
중화인이고 초명은 희지(熙止)이다. 생원·진사·문과에 합격하였다. 성종조 입시(入侍)할 때에 임금이 명하기를 ‘버드나무는 가지가 드문 것을 귀하게 여긴다.’ 라고 하시며 희지(稀枝)라는 이름을 하사하시고 호당에 독서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렸다.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청백하였으므로 본조 명신록에 기록되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우리는 공이 조선 500여 년 역사상 흔치 않는 명신(名臣)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봉은 1439년(세종 21) 순창군수를 지낸 아버지 맹순(孟純)과 어머니 나주 정씨(鄭氏)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4~5세 때에 모친과 함께 울산으로 가서 당시 이 지역의 세력가였던 충숙공(忠肅公) 학성(울산의 별칭)인 이예(李藝, 1373~1445)의 후원으로 학업에 정진한 것 같다. 공이 손녀의 배우자로 공을 맞아드린 데서 알 수 있다.
24세 때에는 생원·진사 양시에, 1474년(성종 5)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 때 성종의 부름으로 알현했는데 희지(稀枝)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이해에 검열, 이듬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1475년(성종 6)부터 3년간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후 부수찬, 교리, 문학 등을 역임했다.
1478년(성종 9)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을 때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자 왕이 승정원에 묻기를 ‘양희지는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으니 내가 만류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는데 승지 등이 아뢰기를 ‘양희지의 재주는 문무를 겸하였으며 쓸 만한 사람입니다. 형이 하나 있어 시양(侍養)하고 또 형의 아들도 있으며 그 어머니도 질병이 없으니 만류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여 결국 승낙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대사헌 윤효손(尹孝孫)이 다시 건의하여 조정의 논의를 거처 윤허를 받아 외직인 사천현감으로 제수되어 80노모를 봉양할 수 있었고 1483년(성종 14) 현풍 현감이 되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 후 홍문관 전한을 거쳐 상의원 정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1497년(연산군 3)직제학이 되었다. 왕이 이례적으로 문관인 공을 경상도로 보내 삼포에 출몰하여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왜인들을 다스리고 추장 사두(沙豆)를 잡아 죄를 다스리고 회유하여 평온을 되찾게 하였다.
이듬 해 무오사화 때에는 좌부승지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바로 사직했다. 1500년(연산군 6)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인사에 불이익을 받은 박림종을 변호하다가 익산에 유배되었다. 장령 이의손 등이 공에게 죄를 묻는 것은 언로를 막는 길이라 하여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2년(연산군 8) 죄가 풀려 동지중추부사 겸 세자우부빈격(世子右副賓客)이 되었으며 이듬 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 종2품 부시장) 재임 중 졸하니 향년 66세였다.
박안성(朴安性)이 왕에게 아뢰니 세자가 2일 동안 강을 금하도록 했다. 1507년 중종이 이현보에게 지참시켜 제문을 보내왔다.
저서로 <대봉집>이 있고 대구의 파동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특히, 조광조가 유배 중인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려 할 때 소개 편지를 써 준 점은 조선성리학의 맥을 잇게 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공이 사직을 청한 1478년 (성종 9) 6월 5일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노모(老母)가 형과 그 아들과 함께 대구부에 살고 있다고 했고, 서영곤이 쓴 무릉서당기(武陵書堂記)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우거한 곳을 미리(美理) 즉 오늘날 동촌 일대라고 했다. 따라서 공의 나이 40세 전 후 모친과 형은 울산에서 대구 동촌으로 이거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둘째 아들 배선(拜善)이 대구의 재지사족으로 파잠 즉 파동에 세거하던 옥산인 전중견(全仲堅)의 따님과 혼인하여 처의 고향에 살게 되면서 수성구 파동 지산동일대에 정착했던 것 한 같다.
공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처조부(妻祖父)인 이예는 매우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상대국에게 불이익을 주는 외교가 아니라 양국이 상생하는 외교를 펼쳐 일본에서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대마도의 원통사에 그를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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