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청백리 문평공 전백영(全伯英)

이정웅 2011. 2. 13. 20:12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소재 박곡서당

 박곡서당 편액

 문평공 전백영 유허비

 정평공 전백영 종택

 

종가 편액

 

청백리 문평공 전백영(全伯英)

 

 

1697년(숙종 23)년 우석규(禹碩珪, 1648~1713)가 편수한 <대구읍지>의 인물조에는 고려시대 3명, 조선시대 18명 등 모두 21명이, 1757년(영조 33) 조춘경(趙春慶, 1714~1786)이 증보한 <대구읍지>에는 상기 21명 이외에 18명이 추가되어 효자, 효녀, 열부를 제외하면 신라 이래 조선 영조 때까지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은 모두 39명이었다.

웅부치고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비록 문·무과에 급제했다 하드라도 행의(行義)가 바르지 못하고, 학문이 높지 않으면 넣지 않는 선발기준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대구를 빛낸 인물들이지만 그 중에서 특별한 분이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 1345~1412)이다.

토박이인 달성 배씨나 달성 서씨, 현풍 곽씨, 하빈 이씨 등은 이미 나라에서 봉토를 받은 지역의 호족들이고, 또한 인천 채씨나 경주 최씨, 단양 우씨, 동래 정씨, 성주 도씨들은 비록 관향(貫鄕)은 대구가 아니지만 일찍이 터를 잡아 재지사족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본관이 옥산(玉山, 경산의 별호)인 공은 그렇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대구의 인물 조선조에 수위(首位)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은 1345년(고려 충목왕 1) 수성구 고모에서 태어나 후에 파잠(巴岑, 파동)으로 이거하면서 아호마저도 파동을 흐르는 신천 즉 파계(巴溪)로 했다. 정몽주로부터 글을 배워 27세 때인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했다.

초임부터 관료들의 비리는 물론 왕의 실정에 대해서도 바른말을 할 수 있는 간관(諫官)을 맡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꼭 옳은 것만 승리하는 것은 아닌 것이 권력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해 오히려 좌천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권신 이인임을 탄핵했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10여 년간 하동에서 유배생활도 해야 했다.

그러나 왕이 바뀌고 공의 간언의 정당함이 알려지면서 수원부사 좌·우사의로 복귀했으나 이도 잠시 충청도 결성으로 다시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청장년시절의 어려움과 달리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공의 관직은 대체로 순풍을 만난다. 그러나 초기에는 역시 간의대부 즉 언관이었다.

그 후 병조전서, 풍해도(황해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등을 역임했다.

1399년(정종 1)공의 나이 55세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하던 중 왕명으로 조정에 복귀,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며 기강을 확립하는 오늘날 검창총장과 역할이 비슷한 대사헌(종2품)을 맡았다.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임금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유를 묻자 ‘공자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시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어 ‘임금의 배워야 할 학문으로는 <대학>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1400년(정종 2) 마침내 고향땅을 다스리는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즉 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양촌 권근(권근, 1352~1409)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예부터 품은 생각 서로 같았는데

오늘 아침 성 동쪽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네.

정영 주고픈 말은 다름 아니라,

모름지기 *감당나무 아래 쉬었던 소공과 같이 하소서.

*감당나무는 팥배나무를 말한다. = 필자

*시문 = 구본욱('문평공 전백영에 관한 고찰', 유학과 현대 제11집)

 

 

그러나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근무기간은 불과 8개월에 불과 했다. 1404년(태종 4)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使)로 명나라 서울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세자의 책봉을 청하였다. 그해 7월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1406년(태종 6) 다시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태종이 화곡(禾穀)의 풍흉을 묻고 손실을 입을 때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는데 백성들이 싫어하는 까닭을 묻자.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백성이 있는 뒤에 나라가 있는데 경차관이 된 사람들이 백성의 병폐는 살피지 아니하고 나라와 백성을 둘로 여겨 나라만 이롭게 하려하기 때문에 민생의 불편이 많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왕이 ‘매우 옳다’ 했다고 한다.

1412년(태종 12) 전 경기도 관찰사 전백영이 늙고 병들어 고향 경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면서 ‘전 재신(全 宰臣)이 중외로 근무하여 공로가 있는데 지금 돌아간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말 먹이와 간식을 주어 보내라 하였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공은 그 해 68 세로 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3일 동안 조회를 금지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