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대구출신 옥산인 계동 전경창

이정웅 2011. 1. 8. 20:24

 

 

계동 전경창을 기리는 무동재 전경 대구시 수성구 파동 서당골

무동재 현판

계동선생 유적비

 

퇴계학의 대구 전래와 계동 전경창

 

 

지방화시대를 맞아 전국에는 수많은 향토사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긍정적인 면이 많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 교육이 왕조사나 중앙정치사 중심으로 흘러 왔기 때문에 지역사가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전공하는 학자도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발굴하여 현장을 중심으로 집필하게 되니 내용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현장감이 넘치고 이야기꺼리도 다양해져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좋다. 이런 점에서 정사(正史)나 역사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고 딱딱하다고 여겨지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측면도 있다. 특히 애향심을 가지게 해 지역공동체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러나 폐단도 없는 것이 아니다. 비전공자이다 보니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애향심이 앞선 나머지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범한 오류의 대표적인 시례가 퇴계학의 대구 전래(傳來)과정이다. 수성구 성동마을 고산서당에는 퇴계선생이 강학한 기념비가 있고, 1564년(명종 19)동구 서원마을에 후학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木+梁, 1519~1592)과 이주 등이 사림과 힘을 합쳐 퇴계의 생사당(生祠堂, 후에 연경서원으로 사액됨)을 지을 만큼 대구도 퇴계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도산과 멀어서 그랬던지 직계 제자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전병견(경산시경계산행협의회)회장으로부터 구본욱 대구향교 장의를 소개 받아 ‘조선중기이후 대구지역의 유학과 관련하여’라는 부제가 붙은<계동 전경창 선생의 연보작성을 위한 시론>이라는 소책자를 받아보고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내 무식을 자책하며 향후 향토사를 연구함에 있어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구(具) 장의에 의하면 당시 대구에 사는 사람으로 ‘도산급문제현록’에 등재된 사람은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과 추월헌(秋月軒) 채응룡(蔡應龍, 1530~1574) 두 분뿐이었다. 그러나 추월헌은 본디 대구사람이기는 하되 아버지 채증이 을사사화로 벼슬(예조정랑)에서 물러나 안동 임하에 정착 ,그곳에서 출생 도산에 수학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대구로 옮겨 살았다고 하니 실제 대구 출신은 계동선생 한 분 뿐이었다.

계동선생은 24세인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그 후 1561년(명종 16) 임하 정사철의 연화재(煙花齋)를 방문하여 주자서를 강론하였으며 1564년(명종 19) 매암 등과 연경서원을 창건하고, 1566(명종 21) 35세 때에 모당(慕堂) 손처눌(11세)과 태암(苔巖) 이주(11세)가 공에게 배움을 청했다. 이 때 아호를 계동 즉 신천의 동쪽에 기거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낙재 서사원(17세)과 괴헌 곽재겸(20세)이 찾아옴으로 각기 <심경>과 <근사록>을 주었다.

1571년(선조 4) 연정 서형, 남간 서식 형제와 송탄(송담) 채응린이 청하여 청하 내연산을 유람했다. <유산록(遊山錄)>을 남겼으나 임란 때 유실되었다고 한다.

1572년(선조 5) 형 응창이 문과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73년(선조 6) 그의 나이 42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 역시 문과에 급제했다.

1575년(선조 8) 출사해 경주, 진주교수를 시작으로 성균관 학록, 정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대교, 봉교를 거처 1581년 병조좌랑(정 6품)에 올랐다.

이 때 그때까지 일반사신이 겸하든 종계변무(宗系辨誣)업무를 전담사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이를 선조가 받아들여 성사시켰다. 종계변무란 반대파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이라고 명나라에 허위로 고발하여 이것이 문서로 굳어지면서 조선왕실의 정통성이 훼손되자 개국 후 200여 년 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시정을 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후 영변 통판을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정5품)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1585년(선조 18) 54세에 한양에서 돌아가셨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 원종공신으로 녹훈되고 홍문관 응교(정4품)로 증직되었으며 1635(인조 13)연경서원 방묘(榜廟)에 봉안되었다.

조선 말기 대구의 거유였던 임제(臨霽)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계동을 일러 ‘대구지역의 유학은 계동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라고 했다.

그 후 공의 제자들은 성주와 대구에서 활동하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문하에 흡수되면서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계동선생은 정구에 의해 소위 한강학단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손처눌이나 서사원 등을 통해 대구 유학에 디딤돌을 그것도 아주 튼튼하게 놓은 분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