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와 보성 가내마을의 뽕나무

이정웅 2014. 3. 9. 08:06

 

 서재필 박사의 어머니가 꿈에 용이 뽕나무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잉태했다는 뽕나무

 선생이 태어난 초당

 서재필 박사

 서재필기념공원내에 있는 독립문 모형

 서재필을 기리는 송재사

 태몽 설명문

 송재의 외가

초당 전경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와 보성 가내마을의 뽕나무

 

 

 

 

 

대구가 본향인 대구 서씨는 본관지를 떠나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고, 정치적으로는 서인(西人) 편에 섰던 집안으로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연이어 배출한 진기록을 보유한 명문이다.

서종태(俆宗泰) 영의정, 서명균(徐命均) 좌의정, 서지수(俆志修) 영의정 등 3대에 걸쳐 정승이 배출되고 서유신(俆有臣)ㆍ서영보(俆榮輔)ㆍ서기순(俆箕淳) 등 3대가 대제학을 연임했다.

송재 서재필(1864~1951) 박사도 역시 대구 서씨다. 그런 공이 남도에서 태어나고 그를 기리는 기념공원이 녹차의 고장 보성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보성을 찾아 <서재필기념공원>을 둘러보고 문덕면 가천리 가내마을로 향했다.

안내판이 조그만 해 공원소장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면 놓질 뻔 했다. 마을 역시 여느 시골과 다름없었다. 생가는 맨 안쪽, 넓은 공간에 사랑채와 안채, 별채 등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조참판을 지낸 외증조부 이유원(李有源)이 살던 곳이다. 외조부 이기대는 3천권의 장서를 보유한 학자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아들 이지용, 손자 이교문, 증손자 이일과 더불어 4대의 문집 <가천세고>를 남겼다.

 

송재(松齋)는 1864년(고종 1)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7살 때까지 보성에서 자라다가 충청도 진잠현(鎭岑縣, 현 대전시 유성구)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이조판서를 지낸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의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에 참가해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3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4개월 뒤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 재창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고학으로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수학하여 모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고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의 딸과 결혼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고문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내놓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를 간행하여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소진하여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가 되기도 했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G.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 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1977년 대한민국장 추서되었다.

 

송재의 출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머니 성주 이 씨가 어느 날 큰 황룡(黃龍)이 초당 옆 바위 사이에 있던 뽕나무를 휘감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태몽임을 직감한 어머니는 그 뽕나무 잎을 전부 따서 갈아 마시고 먼 곳에 있던 남편을 오도록 하여 그 날 밤 잉태했다고 한다.

송재가 태어나든 그날은 공교롭게도 남편 역시 급제하니 집안에 겹경사가 있다하여 처음 이름은 쌍경(雙慶)이었다고 한다.

현재 송재가 태어난 초당에는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당초 것은 6, 25 때 불에 타 죽고 2003년 새로 심은 것이다. 노랗게 단풍이 들어 찾아간 나그네를 즐겁게 해 주었다.

뽕나무의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새로 알게 되었다.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선생의 일생에 비하면 생가나 공원은 너무 조용했다.

벌교로 가서 별미 꼬막으로 점심을 먹고 낙안읍성, 조정래문학관을 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