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서원 경내에 있다. 1883년(순조 33)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내려온 서희순(徐憙淳, 1793~1857)은 이곳 대구가 그의 조선(祖先)이 오래 세거한 곳이라는 기쁨에 이듬해인 1884년 일족 600여 명을 모아 시회(詩會) 겸 화수회를 열고 세운 빗돌이다.
모두 9명이 시작(詩作)에 참여하여 각기 1연(聯)씩 시를 지어 구연(九聯)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완성한 연구시(聯九詩)이다. 특히, 9명이 각기 빗돌에 글자를 새긴 점이 특이하다.
대구지역에서는 최초의 시비이고 9명이 연구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빗돌을 세운 것은 사례가 흔하지 않은 점에서 문학사의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달성서씨 족회시비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는 다르다 할지라도 한 근원에서 나왔으며 희순의 본관은 달성이라 우리서가 본도에 관찰의 인부를 차기 세 번이라 / 異派一源出熹淳達城貫我佩符三守在 (서유문(徐有汶), 안동, 소호리)
안렴 절도 백여 년인데 상환곡을 감하신 전석의 자취를 추모하세 / 按節百年餘蠲缺糴追前蹟 (서여(徐畬), 안의 현감)
사우(숭현사)를 우러러보니 옛 거리를 느끼니 여기에 종족을 모음이 마땅하다 / 瞻祠感舊閭於斯宜聚族 (서정(徐楨), 영천 언하동)
지금에야 한 가지 옷깃을 가지런히 하여 꽃나무 아래에서 친족끼리 정담을 나누네/ 今也共聯裾花樹輸情話 (서용보(徐容輔), 삼가 현감)
영호에 색거한 것 한스러우나 기쁘게 술잔 들고 즐거워라 / 嶺湖恨索居團燮盃酒樂 (서석보(徐石輔), 신녕 현감)
슬프다 조상이 살던 터이라 곧 이 땅에서 아름다운 모임을 이루니 / 捿愴桑梓墟即地成佳會 (서필순(徐弼淳) 삼가자(三嘉子)
종족이 도타이 하여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동성보다 더 좋은 것이 없네 / 敦宗遡厥初莫如同姓好 서상정 (徐相鼎) 진사
누가 허심탄회로 대하려나 다른 날에 오는 자들은... / 孰不素襟虛他日南來者 (서표(徐杓), 산격동)
서희순은 돌에 시문을 새기면서 마지막 연에 “반드시 석면의 글을 보시라(須着石面書熹淳聯句名書”는 글을 덧붙여 고향 사람들을 만난 것을 크게 기뻐한 것 같다.
서희순은 아호가 우란(友蘭)으로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에 등용되어 대교(待敎)와 응교(應敎) 등을 지냈으며, 1824년 대사성이 되었다. 이어서 이조참의·대사간·홍문관 부제학·이조참판·예조참판·직제학 등을 지내고, 1833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835년(헌종 1)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판윤과 예조·병조·형조·호조·이조의 판서 및 좌참찬, 판돈녕 부사·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1855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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