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춘 문기열님이 기증한 수석
우춘 선생 기념비
평생을 수집하고 애장하던 수석을 기증한 문기열님은 이력이 매우 독특한 분이다.
젊은 시절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도 수석의 매력에 빠져 청송, 문경, 단양 등 전국의 수석 산지는 물론 중국, 일본 등 외국까지 나가서 수집할 정도로 탐석에 열정을 기울여 양적으로도 많이 모았지만 특히 12지상(十二支像), 사군자(四君子) 등 질적으로도 희귀한 형상석(形象石)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우춘(雨春, 文其烈님의 雅號) 선생은 중국, 일본의 수석 애호가는 물론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남종화(南宗畵)의 대가 남농(南農) 허건(許楗) 선생과도 교분을 쌓았고 영남을 대표하는 서예가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님과도 허물없이 교류했던 예술적 감각과 식견도 높으신 분이다.
남농과 죽농이 우춘 선생의 수석 전시실에서 우연히 만나 각기 그림을 그려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부탁했더니 두 분께서 그림을 그려 놓고도 서로 낙관(落款)을 먼저 하지 않으려고 이른바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가 나이가 여섯 살 아래인 남농(1908~1987)이 먼저 하고 죽농(1902~1978)이 나중에 했다는 일화를 간직한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멋을 아는 분이다.
수석에 관한 일로 목포(木浦)를 방문하면 남농께서 그 고장 출신으로 당시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던 가수 이난영을 불러 노래와 술로 여흥을 즐겼던 이야기 등 호남의 예향 목포와 경상도의 심장인 대구를 오가며 두 분이 맺어 온 인연 등의 비화(秘話)는 지역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누군가 별도로 기록을 남겼으면 할 정도로 흥미롭다.
일면식도 없었던 우촌 선생과 인연을 맺어 준 것은 지역 일간지 영남일보였다.
지금도 게재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말영남의 인물 초대석에 수석애호가 우춘 선생이 소개되고 인터뷰 말미에 원하는 공익기관이 있다면 기꺼이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때 수목원을 기획하고 있던 때였으니 좋은 사안일 수 있구나 생각하고 신문을 오려 책상 서랍 속에 간직해 두었다.
마침내 시장의 결재를 받아 구체적으로 착수 단계에 들어가자 신문을 꺼내들고 우춘 선생의 전시실을 찾았다.
평생을 수석 수집에 바쳐 한 점 한 점 그분의 추억과 손때가 묻은 소장품을 시민들을 위해 기증하겠다는 보도 내용은 사실 그때 기자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한 것일 뿐 막상 이렇게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으며, 가족들과 협의해 볼 터이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얼마 후 승낙한다는 연락이 왔지만,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히려 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분의 고귀한 뜻을 어떻게 기리는 것이 현명할까 하는 생각으로 오히려 중압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우선 기증한 작품이 제대로 전시되도록 하기 위해 목포시가 운영하고 있는 수석전시관을 직접 가 보기로 했다.
설계를 맡은 이제화 박사, 전시관을 디자인할 건축가 장원열 선생, 담당자 김장길 주임, 우춘 선생, 나, 이렇게 5명이 목포로 향했다.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전시대의 높이가 관람객이 보기에 합당한지 재질은 무엇으로 했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대구수목원에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옆에 있는 남농미술관과 유달산의 조각공원도 둘러보았다.
나와 이 박사, 김장길님은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난대식물을 중심으로 조성된 완도수목원으로 향했고 문기열님과 장원열님은 대구로 되돌아갔다.
당초
구상했던 독립 전시실을 마련하지 못해 청사 별실에 전시되어 있으나 그래도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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