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뽕나무 가치의 재발견

이정웅 2006. 11. 18. 17:59

충익사의 큰 뽕나무

 노랗게 물든 뽕나무 잎

 거대한 뽕나무 줄기

시대 상황에 따라 쓰임새가 변하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겠는가만은 경남, 의령, 충익사(임진왜란이 있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곽재우 선생을 기리는 사당)에서 노랗게 물든 뽕나무를 보며 이 나무 역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목화에서 뽑은 실로 짜여진 면직물이 일반화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비단은 가볍고, 질기며, 보온성이 뛰어난 섬유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잠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었다. 특히 조선조에는 창덕궁원에다 채상단(採桑壇)을 설치하여 왕비가 친잠례를 거행하여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박정희정권시대에는 부족한 외화를 벌어 나라를 부강시키기 위해 가발은 물론 비단도 많이 수출하기 위하여 뽕나무 심기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전국의 많은 야산이 뽕밭으로 변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 등 경쟁국가에 밀리면서 수익이 높은 다른 농작물로 대체되어 그 많던 뽕밭이 사라지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뽕잎을 따기 위해 키를 낮춰키워 뽕 밭이 많아도 큰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충익사의 뽕나무는 달랐다. 키도 클 뿐만 아니라, 단풍이 어찌 그리 고은지 그 때 차라리 베어내지 말고 조경수로 활용해 공원 같은데 재활용했으면 자원낭비도 막고 우리강산도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캐내다 남은 것이 더러 보이는데  그 것 역시 지금이라도 공원이나 조경지에 옮겨 심어 풍치수로 활용했으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