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장학금을 주는 예천 감천면의 석송령

이정웅 2006. 11. 16. 18:46

 석송령의 아름다운 자태 

 석송령 줄기

 석송령 2세

 석송령에서 떨어진 씨앗이 발아 저절로 자란 어린 나무를 키우고 있다.

 석송령 뒷집에서 팔고있는 녹두로 만든 창포묵 별미 맛이 참좋았다.


 

권리행사의 주체인 사람이나 법인(法人)이 아니면서도 세금을 내는 나무로 지금까지 예천군 감천면의 석송령(石松靈,천연기념물, 제294호 )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같은 군내 용궁면에 있는 황목근(黃木根)도 세액(稅額)은 석송령에 미치지 못하나 세금을 내기는 마찬가지다. 두 나무가 지난해 예천군에 납부한 세금을 살펴보면 석송령은 39,950원을, 황목근은 18,650원을 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두 나무가 소유한 땅을 비교해보면 석송령은 4,757m2, 황목근은 12,899m2로 오히려 후자가 더 많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은 두 토지의 공시지가가 상이한데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각기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아름다운 풍습을 가진 고을은 전국에서 예천뿐이 아닌가 한다.

대다수 다른 지역사람들은 나무가 자라는 곳은 그냥 두어도 가져갈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름을 지어주거나 소유권을 명백히 하기 위해 등기까지 해주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예천군만 이런 현상인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태도가 분명한 예천사람들의 기질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석송령도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원래 풍기 쪽에서 자라든 소나무였다고 한다. 600여 년 전 어느 해 홍수가 나자 마을 앞을 흐르는 내가 범람하게 되고 이 때 떠내려 오던 어린 소나무를 건져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 후 어느 때부터인가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당산(堂山)나무가 되면서 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석송계(石松契)가 구성되어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지내는 신목(神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나무가 서 있는 토지는 마을공동재산이 아니고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 1920년 경 모두들 가난하게 살 때였다. 한 평의 땅이 아쉬웠던 시절 어쩌면 목숨과 같이 중히 여겼을 땅을 기증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의 딸이 구미에 살고 있다는 풍문만 있을 뿐 그가 누구인지 본관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갸륵한 미담을 고맙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 석평리에서 석(石)자를 따서 성(姓)으로 삼고 혼령이 깃든 소나무라고 하여 송령(松齡)이라고 지어 공부에 등재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분의 아름다운 마음이 나무를 지켜주는 신으로 변해 그런지 일제강점기 전쟁에 필요한 군함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러 오던 순사(巡査)가 자전거 핸들이 부러지면서 목을 다쳐 죽자 인부들은 나무의 영혼이 노한 것이라 하여 모두 달아났으며, 한국동란 때에는 이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나무 밑의 넓은 공간에 야전 병원을 열었는데 당시 유엔군들이 폭격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이 나무부근만은 안전했으며, 마을 젊은이들이 참전했는데 이웃마을 사람들은 많이 전사했으나 석평 마을 사람들은 희생된 사람이 없어 이 모든 행운이 석송령의 영혼이 보살펴준 것이 아닌가 하여 석송령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석송령을 보기위해 찾으니 이래저래 예천의 명물이 되고 있다.

석송령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최초로 세금을 내는 나무, 자태가 아름다운 나무 정도로 만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자랑거리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마을의 초, 중, 고생을 상대로 44명에게 장학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이 주는 하사금 500백만 원을 종자돈으로 시작해 현재 1,800만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고 한다. 나무가 주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한 사람들은 국내에서는 물론 지구상에서도 이들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장차 지역을 빛낼 인물로 자랄 것이 분명하다.

지난여름 예천을 찾았다 이 곳 출신이면서 도청과 도 산하 공기업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K처장이 귀향하기 위해 짓고 있는 전원주택을 구경할 겸 묵혀 둔 논밭에 어떤 작물을 심으면 손이 덜 가도 되는지 조언도 해 줄 겸이었다. 공교롭게도 석송령이 있는 마을이었다. 청렴하게 공직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한학(漢學)에 조에가 깊은 분이다. 그러나 집을 지으면서 그 분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외장이나 규모가 아니라, 많은 책을 넣을 수 있는 서재(書齋)와 오래 동안 보관이 가능한 술독을 갈무리할 창고일 만큼 멋을 아는 분이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한 때는 아직 짓고 있는 중이어서 대충 훑어볼 뿐이었다.

일행이 석송령을 찾았다. 모두들 감탄했다. 아주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것을 볼 때 주민들이 얼마나 이 나무를 사랑하는지 짐작이 갔다. 한 쪽 편에 어린 나무가 포트에 재배되고 있어 참으로 흐뭇했다. 찾아가는 곳 마다 지적하는 말이지만 후계목 문제였다. 오래된 노거수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유전자원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한다. 특히 400~500년 정도 자란 나무는 비바람과 건조와 냉해, 병해충 등 수많은 악조건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존재인 만큼 같은 종의 다른 나무들과 무엇인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것을 관상용으로 키우든, 품종을 개량하는데 쓰던 상업적으로 활용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예를 들면 고려 말 강회백(1357~1402)이 심은 오래된 정당매라든가 선초(鮮初)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이 심은 늙은 감나무 등 지금까지 살펴 본 노거수 중에 이미 쇠락하여 곧 죽을 것 같은데도 후계목을 키우는 곳은 한 군데도 못 보았는데 이곳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적으로 씨가 떨어져 돋아난 것을 옮겨와 심은 것이라 해서 아쉬웠다. 왜냐하면 소나무는 바람을 통해 수정하게 때문에 부근의 다른 소나무와도 수정이 가능해 석송령의 순수혈통을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력만은 대단해 잘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꺾꽂이나 접(接)을 붙이도록 권유했다. 동네사람들도 기억하지 못 하는 민초(民草) 이수목님의 숭고한 정신에 힘입어 그런지 석송령은 오늘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