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산에 있든 시가지에 있던 또한 천년 전에 세워졌던 최근에 세워졌든 모든 절은 욕심(貪)·분노(嗔)·어리석음(痴)의 삼독(三毒)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지어지나 동화사는 좀 다르다. 첫째, 신라가 불교를 공인(公認)하기 이전인 493년(소지왕 15)에 세워진 절이라는 점이 그렇고. 둘째, 우리나라 법상종의 3대 본산(本山)이며. 셋째, 신라왕실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다툼의 악연을 해원(解寃)한 화해(和解)의 사찰이며. 넷째,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 고려불교의 중심 사찰이 이었다는 점이며. 다섯째 사명당이 승군 본부로 활용한 호국사찰이었던 점이 그렇다. 동화사가 신라, 고려 양조(兩朝)에 걸쳐 사세를 크게 확장하고, 조선조의 혹독한 배불정책에도 살아남아 오늘날 조계종 제9교구본사로서 자리 매김 되었던 바탕에는 신라의 왕자였던 승려 심지(心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아버지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이 직전의 왕이었던 애장왕(재위;800~809)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던 만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15살에 중이 되어 동화사와 인연을 맺는다. 속리산 법주사 영심(永深)으로부터 진표율사가 미륵불(彌勒佛)로부터 받은 불간자(佛簡子)를 가져와 던져 떨어지는 곳에 절을 지으니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피어 유가사(瑜伽寺)였던 절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로,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한 장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희강왕(僖康王;재위836~838)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閔哀王;재위838~839)을 기리는 삼층석탑 (보물 제247호)을 세워 동화사를 신라 왕실의 해원(解寃)의 절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에 이 곳 팔공산 일대에서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으나 아쉽게도 고려의 대장 신숭겸과 좌장 김락이 전사하고 태조조차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사지(死地)를 벗어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혹자는 이 전투를 두고 동화사가 백제지역 출신의 진표가 개창한 법상종의 본산으로 당시 승려들이 후백제의 견훤을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심지어 여초(麗初) 행정구역 개편 시 수창군이, 수성군으로 이름이 바뀌며 동경유수관의 속군(屬郡)이 되고 대구현이 경산부(지금의 성주)로 이속 되는 것을 두고 전쟁에 패했던 왕건이 대구를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본 결과로 연결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당시 대구지역에는 친 신라계의 호족(豪族) 이재(異才)가 동화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전투 중 왕건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리탑(팔간자를 말함인 듯?)에서 빛이 나고, 영조선사(靈照禪師870~947)가 태조 왕건을 만나 화를 면하게 해주었더니 감사하게 여겨 절을 크게 도왔다는 기록 등을 볼 때 동화사 스님들이 견훤을 도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정종 2년(1036)에는 승려들의 구족계(具足戒)를 수여하는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 동화사가 영통사, 숭법사, 보원사와 함께 지위가 격상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다만, 신종 2년(1202) 부인사의 승려와 함께 경주의 반란군인 별초군을 도와 지금의 영천을 공격하는데 참여하여 무인정권에 대항한 적은 있었다. 그 후 보조국사 지눌(1158~1210)스님이 주석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후기에는 홍진국사 혜영(惠永:1228~1294)이 주지가 되면서 무인정권으로 몰락한 동화사를 다시 크게 중창하였으며 충숙왕 8년(1321)에는 승직과 주지 임명 등 불교행정 즉 승정(僧政)을 총괄하는 자정국존 미수(彌授1240~1327)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동화사는 다시 고려 불교계의 중심 사찰로 자리를 잡았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초토화될 때도 동화사는 오히려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이 주도하는 승군의 본부가 되어 호국 사찰로 자리 매김 된다. 영·정조대에는 의첨 인악(仁嶽 1746~1796)이라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스님이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의 유학자들과 교분을 맺음으로 관료와 유생들의 횡포로부터 절을 지켜내고 오늘에 이른 게 아니한가 한다. 중창 설화에 오동(梧桐)나무가 등장하며, 절의 앉은 자리가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라 하여 문루를 봉서루라 하고 경내에 오동과 대를 많이 심어 상서로운 새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는 전설을 상징적으로 꾸며 놓았으나,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라, 벽오동(碧梧桐)나무의 열매만 먹는다. 어느 아는 채 하는 사람이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樺寺鳳凰門)을 입공산동화사풍풍문(入公山桐樺寺風風門)이라고 하여 무식을 스스로 드러내 망신을 당했다는 이 길은 약간 경사져 걷기가 힘들지만 그만큼 건강에 좋고, 맑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계절별로 모습을 달리하는 아름다운 숲을 보면서 일상에 찌든 심신을 재충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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