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국채보상운동의 산실 대구광문사

이정웅 2006. 12. 14. 14:19

몇 년 전까지 존재했던  대구광문사 옛건물

 대구광문사 옛건물이 사라진 현재의 모습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와 서상돈님

 

2007년은 대구로서는 매우 특별한 해이다. 첫째는 전 국민이 금연을 통해 절약한 돈으로 나라가 진 빚을 대신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고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100년을 맞는 해이고 둘째는 프랑스의 지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가 20세기 초 대구를 다녀가면서 규모는 작으나 중국의 북경성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예찬했던 대구읍성이 100년 전 철거된 해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대구시민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린 일이라면 후자는 전통의 도시 대구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수치스러운 일로 희비가 교차되는 한해가 된다. 다만 지금까지 보존이 되었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도 손색이 없었을 읍성(邑城)의 철거는 친일분자인 박중양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으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온 국민이 동참하고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권회복운동” “ 전 국민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된 최초의 국민운동 그 중심에 대구가 서 있다.” “대구 사람들의 진취적 개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 평가를 받는 국채보상운동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사실 대구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 신문왕 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구토(舊土)를 포함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대구를 천도(遷都) 후보지로 선택했던 것이 그 것이다. 결국 이루어 지지 못하고 말았지만, 대구라는 곳을 신라의 집권층이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대구는 오래 동안을 오늘 날 읍(邑).면(面)에 해당하는 현(縣)으로 남아 있다가 15세기 초에 군(郡)으로,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고,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경상 감영(監營)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전국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 8도 중의 1개 도(道)일 뿐 여느 도의 감영 소재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근세에 와서 대구가 전 국민들에게 다시 널리 알려진 것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고부터이다. 최근 일어났던 IMF사태에서 보았듯이 선조들은 이미 100년 전에 외채의 해악(害惡)을 알았다는 사실 이외 나라의 빚을 조세가 아니라, 국민의 성금으로 갚자는 국민운동을 벌였으며, 사상 초유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 등,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 민족 전체가 참여한 구국운동(救國運動)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3. 1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 그 모태(母胎)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념사업회가 별도로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겠지만 이른 바 “대구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만큼은 많은 시민이 참가해 대구 사람임이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다양한 이벤트를 펼쳤으면 한다.

지난 시정부에서 대구 정신을 무엇에서 찾아야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던 같다. 그 결과 2004년도에 펴낸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책임연구원 최정환)의 ‘대구향토사연구’인 것 같다. 보고서에는 고대 대구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대구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분석해 놓았다. 특히 가칭 ‘대구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제기해 뿌리 깊은 도시 대구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그러나 일부 사실은 편향적인 시각으로 본 것 같아 유감스럽다.

자치시대의 시정 발전의 요체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시정 참여이다. 시민들의 결속력과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2007년보다 더 좋은 해는 없을 것이다.

이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조성됐고, 기념사업회에서는 기념관 건립, 국제학술회의, 전국금연대회, 기념음악회를 개최하고 국가보훈처에서는  2월의 문화인물로 ‘김광제, 서상돈’을 지정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구정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을 모의했던 대한광문사 건물이 불과 몇 년 전에 사라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 선 것이다. 선조들이 물려 준 귀중한 문화유산 중 사라진 것이 어디 광문사 하나뿐이랴 만 100주년 기념행사를 불과 코앞에 두고 그 것도 기념관을 새로 짓겠다는 등 다양한 계획을 하면서 있는 것도 보존하지 못한 것은 250만 시민의 수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주역의 한 사람인 서생돈(1851~1913)님의 생가도 미리 복원하지 못하고 재건축을하기 위해서라지만 헐어버린 상태로 100주년을 맞아 아쉬움이 더 크다.

대구라는 지방에서 민간주도에 의해 불이 붙어 전국으로 타올랐으며,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던 시절 불과 이틀 후에  패물 모으기기를 주도해 여성운동의 효시가 된 남일동 부녀회의 동참, 무력이 아닌 금연을 통해 전개된 평화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자랑이자 대구정신이다.         

  


          

              

'대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다른 대구십경  (0) 2006.12.31
상화대로 불리던 화원동산  (0) 2006.12.27
아양교와 아양루  (0) 2006.12.02
동화사, 한국불교의 대들보  (0) 2006.11.26
대구수목원 가을 국화전시회  (0) 2006.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