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또 다른 대구십경

이정웅 2006. 12. 31. 22:54
 

 

 무태교에서 바라 본 팔공산

 남소, 성당못

 팔공산 미타봉(동봉의 본디 이름)

 

 

대구의 아름다운 10곳을 노래한 대구십경(十景)하면 사가 서거정(1420~1488)선생을 떠 올리나 5세기 후인 20세기에 와서 사가 선생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대구십경을 노래한 분이 있었으니 일화(一和) 최현달(崔鉉達) 선생이다.

1867년 (고종4) 대구 남산리(오늘날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7세에 이미 시(詩)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28세에 벼슬길에 나아가 경상남도 시찰사(時察使), 칠곡 군수, 대구 판관, 청도군수를 지냈다.

특히 칠곡 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사또가 오신 뒤에 우리가 살아났다’고 할 정도로 학교를 세워 백성을 교화하고,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펴게 되자 지역 주민들이 생사당을 지으려고까지 하여 선생이 직접 나서서 중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죽기를 각오하고 식음을 거부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만류해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친구들이 찾아가 ‘나라를 사랑하는 충(忠)도 중요하지만 어머니를 받드는 효(孝)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설득하여 마침내 풀었다고 한다. 총독부의 회유에도 끝까지 버티다가 1942년 76세로 이승을 마감했다. 저서로 ‘역수설(易數說)’ ‘주지유언(周旨孺言)’ 등과 후학들이 펴낸  ‘일화선생문집’이 있다. 그의 대구십경은 다음과 같다.

 

1 琴湖江 뱃놀이


금호강 봄 물 올라 배를 띄워 노는데

피리 소리 북소리에 백구는 놀라 다라나네.

 차라리 가을달 밝은 밤에 고깃배 올라타고

백구 벗삼아  한가로히 놀으리.

     

     琴湖泛舟


      琴湖春水泛蘭舟

     簫鼓聲聲起白鷗

     何似滿江秋月夜

     漁舟閒與白鷗遊


2 건들바위 (笠岩)고기 낚기


가을 강물 위 저 바위는 갓을 얹은 꼴이다.

낚싯군 앉은 모양이 유유히 한가롭네. 

열길 먼지 속의 사모객이 그를 보니,

문뜻, 벼슬살이 할 정이 다 떠나네.


       笠岩釣魚


       川上岩形一笠秋

       釣魚人坐更悠悠

       十丈塵中烏帽客

       看渠不覺宦情休


3 자래바위와 봄 그름


봄 구름 한 자락이 거북봉을 덮어있다.

거북과 구름은 만물을 은혜로 적셔 줄 뜻 품으시니,

맑게 빛나는 갠 날씨도 좋거니와

이따금 단 비도 내려주신다네. 


龜岑春雲


春雲一抹是龜岑

龜與雲含澤物心

占得韶光晴亦好

時來況復作甘霖


4 琴鶴樓의 明月


학은 가고, 다락은 빈지 어느덧 千年이라.

다락머리 비친 달은 얼마나 차 있는고.

오고 보니 한가윗날, 달은 밝은데,

萬里나 길게 뻗은 하늘에는 티 한 점 없네.


鶴樓明月


鶴去樓空一千載

樓頭來照月幾分

我到中秋正圓滿

長空萬里絶纖氛


5 성당 못 연꽃


南塘(성당 봇) 맑은 경치 돈으로 따질 것가.

 온 못을 덮은 연꽃, 향기는 배를 찼네.

원컨대 바람이 향기 실어 사방을 불게 하면,

여름 농부들 오래 된 병이 모두다 나으련만!


南沼荷花


南塘淸賞不論錢

十頃荷花香滿船

願此香風吹四野

夏畦人共宿痾痊


6 北壁의 향나무 숲


바윗벽 솟아 둘러 十里나 되네.

울창한 숲이 모두 향나무로고.

훗날 여기 와서 結社하련다.

늙은이 많은 분들이 내 고향사람이거늘.


北壁香林


石壁岧嶢十里長

鬱蒼林木盡檀香

準擬他年來結社

老人多是住吾鄕



7 桐華寺 중을 찾다


桐華寺 굽이굽이 층층히 돌길인데,

봄 바람이 흥을 돋아 다리도 감았다네(등산 채비).

물 소리, 달 빛 아래 법당에 당도하여

지난 가을 글 청해 간

그 중 있나 물어보네.


桐寺尋僧


桐寺迢迢石逕層

春風乘興理行縢

泉聲月色金堂畔

爲問前秋乞偈僧


8 櫓院 이별


櫓院의 버드나무 해마다 푸르렀다.

예로부터 여기는 이별하는 곳.

왜가리 東으로 가고, 제비는 西로 날고

주막집 술병은 이별주로 다 나가네.


櫓院送客


櫓院年年楊柳靑

古來離別此長亭

伯勞飛燕正怊悵

倒盡壚頭紅玉甁


9 八公山 쌓인 눈


八公山 萬丈雪이 쌓이고 또 쌓이니,

옥색 같이 영농하고, 은색 같이 맑았도다.

저 산이 다 곳간이고, 저 눈이 다 쌀이라면,

집집마다 해마다 풍년이라 즐기련만!


公嶺積雪


公山萬丈雪堆層(原字는 層옆에 뫼山이 있는데, 이런 글字는 ‘컴퓨터’ 사전에는 안 나와있으니, 손으로 써줄밖에요. 뜻에는 현재 字를 써도 별 손해가 없는데, 四佳선생이 원래 이런 어려운 字 를 쓰셨으니...)

玉色玲瓏銀色澄

願廩如山米如雪

家家歲歲樂豊登


10 砧山(침산)의 저녁 놀


강 물 서쪽 언득에 砧山 푸른 숲이 우거지다.

석양이 비추이니 그림 속의 가을이라.

높은 곳 올라서니 황혼 景色이 기막히네.

이 중에 사람 그리는 시름은 잠시나마 잊어보렴.


砧山晩照


砧巒蒼翠水西頭

夕照重添畵裏秋

向晩登臨無限好

黃昏休遣美人愁




선생은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옛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이 그의 둘째 아들이고 이 시문은 손자 최찬식이 번역했다.

그러나 번역문 중제2경의 건들바위는 '삿갓바위'의 제3경의 자래바위는 '거북바위'의 잘 못이다.   

 

大   邱  十  景 (대 구 십 경)

 

  제1경 : 琴湖泛舟(금호범주, 금호강의 뱃놀이)

  
제2경 : 笠巖釣魚(입암조어, 입암에서의 낚시)

  
제3경 : 龜峀春雲(귀수춘운, 거북산의 봄구름)

  
제4경 : 鶴樓明月(학루명월, 금학루의 밝은 달)

  
제5경 : 南沼荷花(남소하화, 남소의 연꽃)

  
제6경 : 北壁香林(북벽향림, 북벽의 향림)

  
제7경 : 桐華尋僧(동화심승, 동화사의 중을 찾음)

  
제8경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에서의 송별)

  
제9경 : 公嶺積雪(공영적설, 팔공산에 쌓인 눈)

  
제10경 : 砧山落照(침산낙조, 침산의 저녁노월)

  
王維(왕유)의 詩,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元二를 安西로 보내면서) 

    大 邱十景(대구십경)을 노래한 徐居正(서거정)의 七言絶句(칠언절구) 十首(십수)가 傳(전)해오고 있다. 원래 十詠(십영)인 것을 大丘十詠(대구십영), 大丘十景(대구십경), 達城十詠(달성십영), 達城十景(달성십경)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大丘(대구)로서의 邑城(읍성)이 축조되지 않았고 達城(달성, 현재의 달성공원일대)이 그 堡障(보장)이 되어 慶尙道都觀黜陟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巡(순찰)할 때며 大丘邑(대구읍)에는 知郡事(지군사)를 두고 있던 때이다. 일찍이 達城(달성)이 達城徐氏(달성서씨)의 世居地(세거지)임을 지금의 달성공원 경내에 1971년에 세워진 達城徐氏遺墟碑(달성서씨유허비)가 그 來歷(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徐居正(서거정, 1420-1488)의 字(자)는 剛中(강중), 號(호)는 四佳亭(사가정) 또는 亭亭亭(정정정)이다. 世宗(세종) 2년(1420)에 태어났고 太宗(태종)의 王工權確立(왕권확립)에 佐命一等功臣(좌명일등공신)인 陽村(양촌) 權近(권근)의 外孫(외손)이기도 한 그는 世宗(세종) 26년(1444)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오른 후 9代(대) 成宗(성종)까지 6朝(조)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6曺判書(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과 左贊成(좌찬성)에 佐理功臣三等(좌리공신삼등)으로 達城君(달성군)에 封(봉)해지고 諡號(시호)는 文忠(문충)이다. 그의 학문은 天文(천문), 地理(지리), 醫藥(의약), 卜筮(복서), 星命(성명)등에 능통한 대학자로 海東(해동)의 奇才(기재)라 일컬을 만큼 국가의 高文大冊(고문대책)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歷代年表(역대년표), 經國大典(경국대전), 東國通鑑(동국통감), 筆苑雜記(필원잡기), 東文選(동문선), 新撰輿地勝覽(신찬여지승남), 四佳集(사가집)등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大邱(대구)의 十景(십경)은 成宗(성종) 12년(1481), 王命(왕명)에 의해 盧思愼(노사신)등이 중국 明(명)나라의 大明一統誌(대명일통지)를 본 떠서 만든 各道(각도)의 地理誌(지리지)인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남)을 中宗(중종) 25년(1530)에 역시 왕명에 의해 보완하여 증보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남)에 실려 있다.
  大邱(대구)는 이른바 內凌盜地(내릉도지)로 新川(신천)을 軸(축)으로 하여 北東部(북동부)의 八公山(팔공산) 줄기와 南(남)의 最頂山(최정산) 및 琵瑟山(비슬산)줄기로 둘러 싸여 있고 西쪽으로 약간 트여 있는 나팔모양을 하고 있다.

    新川(신천)은 비슬산 줄기에서 發源(발원)하여 南部山地(남부산지)의 谷口(곡구)인 嘉昌(가창)에서 龍頭(용두)부리(용두방천)를 거쳐 시내로 들어 와서 배나무 샘(지금의 梨泉桐(이천동)과 水道山(수도산)(대구수도관리소가 있는 산, 기린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기린산이라 했음) 동쪽 기슭을 스쳐 건들 바위를 지나 이곳에서 한바퀴 돌아 깊은 물 구비를 만들고 다시 連龜山(연구산, 제일여중이 있는 산), 蛾眉山(아미산, 대구 향교가 있는 산, 모양이 나비눈썹 같다고 하여서) 밑으로 해서 東山(신명여고 일대의 산)을 지나 달성공원 앞으로 해서 날뫼(飛山洞, 비산동)으로 하여 達川(達西川, 달서천)으로 흘러 八達津(팔달진, 팔달교부근)에서 琴湖江(금호강)과 合流(합류)하던 것을 正祖 1년(1777)에 大丘判官(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1778년에 사재를 들여 해마다 겪는 대구지방의 물난리를 막고자 물길을 지금의 新川(신천)으로 돌렸고 新川(신천)을 현재의 백사부리(서변잠수교와 침산교부근)에서 琴湖江(금호강)으로 流入(유입)되게 하였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3년후인 1797년에 李公堤碑(이공제비)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매년 1월 14일에 대백프라자 부근인 중구 봉덕 1동 655번지의 신천 堤防(제방), 새내뚝)에 移建(이건)된 李公堤碑閣(이공제비각)에서 방천시장 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祭(제)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남)(이하 新輿覽(신여남)이라 약칭함)의 山川條(산천조)에서 笠巖(입암, 삿갓바위)을 「在新川中其形如笠故名(재신천중기형여립고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新川(신천)은 무엇이며 248년 후인 正祖 2년(1778)에 判官(판관) 李淑(이숙)가 私財(사재)를 들여 대구의 수로를 변경하여 당시 교동에 있었던 孔子廟(공자묘, 향교)의 侵水(침수) 위험까지도 막았다던 新川(신천)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新川(신천)이 되기 이전의 내 이름을 알길 없어 1778년 이후의 新輿覽(신여남)의 重刊(중간) 과정에서 이미 굳어진 新川으로 改字(개자)했는지 아니면 1530年(연)의 新輿覽(신여남)에서도 대구의 수로를 변경한 적이 있어 新川이라고 하였고 그 후의 李判官(이판관)의 수로 변경도 新川이라고 아울렀는지, 아니면 「새내」의 뜻에서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나마 大邱十景(대구십경)이 있었기로 근 500년전의 大邱風光(대구풍광)이 어떠했으리라고 나름대로 그 情景(정경)을 그려볼 수 있게 됨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난주)    금호강 맑은 물에 조각배 띄우고
取此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한가히 오가며 갈매기와 노닐다가
盡醉月明回棹去(진취월명회도거)    달 아래 흠뻑 취해 뱃길을 돌리니
風流不必五湖遊(풍류불필오호유)    오호가 어디더냐 이 풍류만 못하리

蘭舟(난주) : 本蘭(본난) 木蓮(목련)으로 만든 조각배
取此(취차, 次(차)) : 차츰, 점차
                       

五湖(오호) : 중국의 큰 호수로  陽湖(파양호), 靑草湖(청초호), 洞庭湖(동정호),
                  丹陽湖(단양호), 太湖(태호), 또는 격호, 조호, 財湖(재호),
                 貴湖(귀호), 太湖(태호)를 말함.

    琴湖江(금호강)은 그 根源(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慶州(경주)의 母子山(모자산)에서, 또 하나는 新寧(신녕)의 普賢山(보현산)에서 發源(발원)하여 永川(영천) 雙溪(쌍계)에서 合流(합류)하고 河陽(하양), 半夜月(반야월)을 지나면서 구비마다 아름다운 景勝(경승)을 이루니 蛾洋樓(아양루)가 있는 東村유원지 일대가 그렇고 檢丹(검단)의 蒼壁(창벽)과 花潭(화담)의 진달래, 砧山 落照(침산 낙조)와 櫓院(노원)의 白沙場(백사장), 臥龍山(와룡산)의 玉沼岩(옥소암), 江倉(강창)의 절벽을 둘러 江停(강정)나루에서 洛東江(낙동강)으로 流入(유입)하는 大邱의 젖줄로서 江岸(강안) 곳곳에 樓臺亭舍(누대정사)와 景勝地(경승지)가 많아 時人墨客(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國秋(연우공몽택국추)    이슬비 자욱이 가을을 적시는데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    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    잔챙이야 적잖게 건지겠지만
不釣金驚鉤不休
(공몽) : 이슬비가 보얗게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어둑침침한 모양
垂綸(수륜) : 낚시줄을 늘어뜨림, 낚시질을 함
纖鱗(섬린) : 작은고기
金驚(금오) : 금자라

  笠巖(입암) 역시 新川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있어 왔다.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215번지에 있는 속칭 건들바위를 말한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건드리면 건들건들 한다고 건들바위라 이름하였다 한다. 높이 3m, 너비 1.6m의 이 바위가 영검하다 하여 지금도 매년 정월초가  되면 부인들이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면서 치성을 드리고 있다.

    그런데 新輿覽(신여남)에 在新 川中 其形如笠故名 世傳星隕爲石(재신 천중 기형여입고명 세전성운위석) 즉 新川中에 있고 그 모양이 삿갓같아서 이름을 삿갓바위라 한 것까지는 수긍이 가나 별의 운석이 된 돌이라 하는데서 지금의 건들바위는 운석이 아니기 때문에 삿갓바위가 아니다는 疑閣(의각)의 提起(제기)된다. 그래서 일설에는 지금의 新岩橋(신암교) 건너 북쪽에 西洋月山이 있는데 이 山밑 新川쪽에 큰 바위가 높이 솟아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바위등이라 이름하고 山밑에서 옛날 羊을 많이 먹였기 때문에 양지동이라 칭하였다 하나 알 길이 없다. 여하간 앞서의 新川과 이 삿갓바위에 대한 의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겠

龜岑隱隱似驚岑(귀잠은은사오잠)    거북뫼 아득하여 자라산 닮았고
雲出無心亦崙心(운출무심역유심)    구름 토해냄이 무심한 듯 유심 한 것이
大地生靈方有望(대지생령방유망)    온땅의 백성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可能無意作甘霖(가능무의작감림)    가뭄에 단비 만들어 주려 함이네

鰲岑(오잠) : 鰲山, 자라산, 中國에 있는 神仙이 산다는 山
生靈(생령) : 生民, 百姓
甘雲(감운) : 오랜 가뭄뒤에 내리는 장마

   龜岑(귀잠, 거북산)은 運龜山(운귀산),  午砲山(오포산), 자래방우산등으로 불리어온 대구광역시 봉산동의 제일여중이 있는 連龜山(연귀산)을 말한다 純宗(순종)때 大邱府民(대구부민)에게 午正(오정)을 알리기 위해 이 곳에서 포를 쏘았기로 午砲山(오포산)이라 한 것이다.

   新輿覽(신여남)에 連龜山 在付南三里 鎭山  諺傳建邑初 作石龜 藏于山春 南頭北尾 以通地脈 故謂之連龜(연귀산 재부남삼리 진산  언전건읍초 작석귀 장우산춘 남두북미 이통지맥 고위지연귀)라 하여 대추의 진산이 되는데 산등에 돌거북을 만들어 지맥과 통하도록 머리는 南(남)쪽, 꼬리는 北쪽으로 하여 묻고 이를 連龜(연귀)라 하였다는데 막상 현재의 돌거북은 언제부터인가 머리는 東으로 꼬리는 西로 하여 地脈(지맥)과 관계없이 제일여중 교정한 모서리 철책속에 갇혀 있다.

    학교 건축시에 옮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바로 잡았으면 한다. 또 이 連龜山(연귀산)을 지금의 大德山(대덕산)이라 하고 安逸寺(안일사)가 있는 안지랭이골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이의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또 돌거북을 만들어 둔 곳이 옛 서낭당이라는 기록도 있고 보면 이곳에서 祈雨祭(기우제)를 지냈던 것 같고 徐居正의 時도 기우제의 祈禱詞(기도사)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大邱十景(대구십경)은 거의가 景勝(경승)과 風光(풍광)을 노래하면서도 그 밑 바탕에는 國泰民安(국태민안)의 祈願(기원)을 담고 있어 四佳亭(사가

一年十二度圓月(일연십이탁원월)   일년에 열두번   鶴樓(학루)는 琴鶴樓(금학루)를 말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50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舊(구) 達城館(달성관, 客舍) 東北(동북)쪽 모퉁이에 世宗 7년(1425) 당시 大邱邑知軍事(대구읍지군사)였던 琴柔(금유)가 세우고 慶尙道都觀察黜涉使(경상도도관찰출섭사)였던 拙齋(졸재) 김요가 記文(기문)을 썼는데 『옛사람이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 地名(지명)에 따르거나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게 된다.

   巴陵(파릉)의 岳陽樓(악양루, 중국 악양현에 있고 洞庭湖(동정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부감할 수 있는 누각)는 그 地名(지명)을 땄으나 醉翁亭(취옹정)은 저주지사인 醉翁(취옹, 宋의 歐陽修(구양수)의 別號(별호))의 이름을 땄듯이 이제 琴候(금후)가 邑(읍)에 부임했고 邑(읍)에 琴湖(금호)의 이름도 있고보니 그 이름과 樓(누)의 모양이 鶴(학)이 춤추듯 하여 樓에 오른 즉 一琴(일금)에 一鶴(일학)이라 世俗(세속)의 티끌을 털어내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상쾌한 氣象(기상)이로다.

    거문고 소리에 은은히 和答(화답)듯하고 南風(남풍)에 세상의 시름 풀어주는 즐거움이 있으니 그 이름을 琴鶴樓(금학루)라 함이 可하도다.‥‥‥』라 하여 樓(누)의 이름이 지어진 경위를 말해주고 있다.

     琴鶴樓(금학루)를 두고 을은 時句(시구)(姜進德(강진덕), 日僧龍章(일승룡장), 琴柔(금유)에서 樓高(누고), 鈴閣(영각), 朱欄(주란), 明月(명월), 雲鶴(운학), 淸香(청향) 등의 時句로 미루어 가히 그 규모와 情趣(정취)를 짐작할 수

出水新花疊小錢(출수신화첩소전)만성전) : 만백성의 병을 고침

   南沼(남소)란 남쪽 못이란 뜻인데 지금 靈仙市場(영선시장) 들어선 靈仙池(영선지, 또는 靈信池)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당치 않는 말이다. 영선지는 1923년에 넓이 10,017평으로 판 貯水(저수) 灌漑用(관개용) 못이다. 그래서 聖堂池(성당지)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東北쪽에 있는 第 6 景 道洞(도동) 香林(향림)을 『北壁林(북벽림)』이라 한 것과 대칭되게 南沼(남소)라 한 것 같기 때문이다.

   聖堂池(성당지)는 성댕이못이라고도 불렀는데 땅골(당곡)이라하여 성당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에 八聖堂이 있어서 八聖堂里틱 이를 줄여서 聖堂(성당), 聖堂里 하였으나 그 뒤 八聖堂을 헐고 대구 判官金魯(판관금로)가 못을 팠으니 이것이 현재 花園(화원) 방면으로 나가는 大路邊(대로변)에 있는 주위 약 2Km의 못이다. 한 때 그 부근의 도축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로 오염되었으나 지금은 두류공원의 경내가 되었기로 南沼荷花(남소하화)를 다시 보도록 했으면 싶다 또한 이 시에서도 백성의 무병을 바라는 四佳亭의 소망이 역역하
(고벽창삼옥삭장)       옛 벽에 푸른 측백 옥창같이 자라고
長風不斷脚時香(장풍부단각시향)       그 향기 바람따라 철마다 끊이잖네
慇懃更着栽培力(은근갱착재배력)       정성드려 심고 가꾸기에 힘쓰면
留得淸芬共一鄕유(유득청분공일향)    맑은
삭) : 옥으로 된 창
淸芬(청분) : 맑은 향기, 깨끗한 德行(덕행)

   北壁(북벽)의 香林(향림)은 대구광역시 도동 180번지 일대의 절벽산에 자생한 側柏樹林(측백수림)을 말한다. 대구천연기념물 제1호이기도 한 측백나무는 常綠僑木(상록교목)로 원래 중국의 특산으로 알려졌으나 우리나라의 丹陽(단양), 英陽(영양), 蔚珍(울진) 및 安東 等地의 山地에서도 자라고 있는데 북벽의 향림은 측백이 자랄 수 있는 분포지역의 南限界地(남한계지)로 植物地里學士(식물지리학사)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이 북벽 향림이후 이 산을 香山이라고도 하였는데 19세기 초엽 인근에 살았던 아홉 노인의 詩會를 기리는 후손들이 중국 白樂天(백락천)의 香

遠上招提石逕層(원상초제석경층)     멀리 절로 가는 좁은 돌층길
靑藤白襪又烏藤(청등백말우오등)     푸른 등나무 하얀 버선 검은 지팡이
此時有興無人識(차시유흥무인식)     이흥을 누가알라 남들은 모를 것이
興在靑山不在僧(흥재청산부재승)     청산에 취해서 찾을 중 잊었네

招提(초제) : 절, 사찰
靑藤(청등) : 푸른 등나무
白襪(백말) : 흰버선
烏藤(오등) : 검은 등나무, 검은 꼬부랑 지팡이

   여기서 承句(승구)의 靑藤(청등)이 新輿覽(신여남)과 英祖年間(영조년간)에 편찬된 大丘邑誌(대구읍지)에른 靑藤(청등, 푸른등나무)로 되어 있고 純祖(순조) 32년(1832)의 慶尙道邑誌中(경상도읍지중)의 大丘府邑誌(대구부읍지)와 高宗(고종) 32년(1895)에 된 嶺南邑誌中(영남읍지중)의 大丘府邑誌(대구부읍지)에는 「靑鞋(청혜)」(푸른 짚신)으로, 日帝下(일제하) 1924년에 나온 大邱府邑誌(대구부읍지)와 達城徐氏派譜(달성서씨파보)에는 靑衫(청삼, 푸른적삼)으로 나와 있다. 新輿覽(신여남)의 靑藤(청등)대로함이 마땅하나 「푸른등나무 흰 버선에 검은 등나무」 또는 『푸른 등나무 흰 버선에 검은 지팡이』보다는 『푸른 적삼 흰 버선에 검은 지팡이』가 보다 形(형)의 具象化(구상화)를 위해 더 좋을 것 같은데 고증할 길이 없다.

   그리고 洞華寺(동화사)는 大邱(대구)의 東北(동북)쪽 18km 지점인 道鶴洞(도학동)  八公山(팔공산) 기슭에 있는 新羅(신라)의 古刹(고찰)로 炤智王(소지왕) 15년(493)에 極達和尙(극달화상)이 創建(창건)하여 처음 瑜伽寺(유가사)로 하였다가 340년 후인 興德王(흥덕왕) 7년(832)에 憲德王子(헌덕왕자) 心地王師(심지왕사)가 重建(중건)할 때 簡子(간자) 892개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佛堂(불당)을 이룩하니 지금의 籤堂(첨당)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꽃이 피었다 해서 洞華寺(동화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부속 암자는 물론 마애불상(보물382호), 비로자나불(보물383호), 3층석탑(보물386호), 당간지주(보물393호)등 보물 4점과 金剛杵(금강저), 泗溟大師(사명대사)의 眞影(진영)등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경내에 1992년에 완공한 南北統一發願藥師如(남북통일발원약사여)來石造大佛(내석조대불)이 총 높이 30m 중 좌대가 13m, 둘레가  16.5m가 되는 세계 최대의 석불로 알려져 동화사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官道年年柳色靑(관도년년류색청)    한양길 버들잎은 해마다 푸르고
短亭無數接長亭(단정무수접장정)    줄이은 주막들이 길게도 늘어섰네
唱盡陽關各分散(창진양관각분산)    이별의 노래 그치고 흩어진 뒤에는
沙頭只臥雙白據(사두지와쌍백거)    빈 술병만 짝이 되어 모래밭에 딩구네

短亭長亭(단정장정) : 작은숙사와 큰 숙사 옛날에 五里마다
                              단정을, 십리마다 장정을 두었음.
陽關(양관) : 중국의 關門名(관문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敦煌縣(돈황현)에
                  있고 옥王維(왕유)의 渭城曲(위성곡)으로 有名하며 送別(송별)의
                  뜻을 나타냄.

    櫓院(노원)은 大櫓院의 약칭인데 당시 大邱의 북쪽 關門(관문)인 이곳 大櫓院에서 惜別(석별)의 情을 노래한 것이다. 원래 도로 연변에 행인들이 쉬어가게 해 놓은 곳을 院(원) 또는 定구(정)이라 하는데 거리가 먼 곳을 長亭(장정), 가까운 것을 短亭(단정)이라 했고 이곳이 대구서 서울가는 길목의 첫 나루터여서 길손들이 쉬어감은 물론 이별과 만남의 哀歡(애환)이 교차되던 곳이다.

   이 大櫓院 앞이 八達津(팔달진, 팔달교가 놓이기 전의 금호강 나루)이어서 犬郎(견랑)의 關門(관

公山千丈倚峻層(공산천장의준층)    팔공산 천길 높이 가파르게 솟고
積雪漫空沆瀣澄(적설만공항해징)    쌓인 눈 하늘 가득 이슬되어 맑구나
知有神祠靈應在(지유신사영응재)    사당 모시니 신령님 응감있어
年年三白瑞豊登(연년삼백서풍등)    해마다 서설 내려 풍년을 점지하네

沆瀣(항해) : 이슬기운
三白瑞(삼백서) : 정월에 오는 서설
豊登(풍등) : 오곡이 많이 잘 여묾, 풍작

  八空山은 大邱盆地(대구분지)의 東北部를 병풍처럼 가리고 있는 산줄기이다. 新羅(신라)때는 父岳(부악)이라 하였다가 나라의 중앙에 있다 해서 中岳(중악)이라고 불렀고 또 여기서 나라의 公的儀式(공적의식)인 祭天壇(제천단)을 설치하게 되어 八公이라 하였다.

   그후 王建(왕건)과 甄萱(견훤)이 이곳 공산 전투에서 王建이 포위당하여 죽게 된 것을 申崇謙(신숭겸),  金樂(김락)등의  여덟 신하가 장렬히 전사하고 王建을 구했다 해서 八空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정상인 비로봉이 해발 1,192m로 중앙에 우뚝 서있고 좌우로 염불봉, 삼성봉이 양어깨처럼 펼치고 東西로는 동봉, 서봉이 東南으로 관봉, 노적봉,  인봉, 수봉, 북으로 시루봉, 西로 파계봉을 너머 가산에 이르는 環狀山脈(환상산맥)을 이루어 영천, 달성, 군위, 칠곡을 깔고 앉은 靈山(영산)이다. 동화사, 파계사를 비롯하여 부인사, 송림사, 갓바위 등의 크고 작은 사찰, 암자와 기암절벽 및 계곡, 폭포로 사시사철의 절경을 이루고 또한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는 등 대구 시민에게는 가장 큰 휴식처와 등산로를 제공 해주고 있

水自西流山盡頭(수자서류산진두)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방만창취속청추)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春聲急(만풍하처춘성급)    저녁 s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蒼翠(장취) : 푸른빛, 푸른물총새
春聲(춘성) : 방아나 절구 찧는 소리

  砧山은 대구의 新川河口(신천하구)를 지키는 속칭 水口(수구)막이 山이라 하고 방망이를 닳았다 하여 일명 방망치산이라고도 하였다. 높이 144m의 平地(평지)에 솟은 獨山(독산)으로 이조때는壇(여제단)이 있었다 하는데 없어지고 지금은 침산공원이 되었다.

    白沙(백사)부리라 하여 북쪽에 있는 마을 앞에는 흰 모래가 많았으니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푸른 숲에 물든 단풍과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노원 나루에서 팔달교로 흘러 들어가는 금호강의 금빛 물결과 어울러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여제단이란 동네 수채나 水溝(수구)쪽에 돌이나 흙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방아를 Y자 모양으로 거꾸로 세운 뒤 여자의 속곳을 뒤집어 입혀 놓고 묽은 팥죽이나 수수밥을 올려 문둥병이나 못된 돌림병을 퍼뜨리는 여귀, 惡鬼(악귀))를 쫓는 액막이 제사하는 곳이
塵(누성조우읍경진)    위성에 아침비 촉촉히 먼지 씻으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에 푸른 버들 더 새롭네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에게 술 한잔 다시 권함은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양관나선 서역엔 친구 없으리

 

참고문헌 : 대구지 달성군지
                중구문화원의 건들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