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동산 전경
임자없는 나룻배의 촬영지 사문진 지금은 다리가 놓여 나룻배가 없다.
나운규 문예봉 주연의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감독 이규환
길재(1353~1419)선생이 패망한 고려 도읍지를 돌아보면서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고 하였지만 산천 역시 세월의 무게 앞에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그 이치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화원동산이다.
낙동강과 금호강, 진천천의 세 강이 합류하여 넓은 습지를 이루어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가야산과 비슬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화원유원지 일대가 의구(依舊)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화원유원지가 있는 주산의 이름은 원래 ‘잣뫼(미)’였다. 이 것이 한자화 되면서 ‘성산(城山)’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산재한 토성과 고분으로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당시 일대에는 대구를 지배하던 ‘달구벌국’에 버금가는 고대성읍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혹자는 이들 집단이 대가야가 세력을 동쪽으로 넓힐 때 피해 옮겨간 곳이 오늘날 달성공원일대라고도 한다. 더 특이한 전설은 달성이 오목(凹)하게 생겨 여성을 상징하여 자달성(雌達城)이라 부르는 데 비해 화원동산은 반대로 뾰족(凸)하게 솟아 남성에 비유해 웅달성(雄達城)이라 한다는 점이다. 대구시가 달성군을 편입시켜 광역시로 승격한 것을 두고 혹자는 기존의 부족한 택지와 공장용지를 넓힐 수 있어 대구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외형적인 효과와 달리 그 동안 떨어져 있던 음(陰)과 양(陽)이 서로 합하여 두 기운이 조화롭게 상승(相乘)히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한 때 화원동산은 낙동강 1,300 리 중에서 경승이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가야산에서 요양하고 있는 세자를 문병하러 가고 오면서 이곳의 경치에 반해 행궁을 짓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승과 꽃을 감상하던 곳이라 하여 상화대(賞花臺)라 불렀고, 스스로 목욕을 즐기던 어욕천(御浴泉)도 두었다.
지역의 선비들 역시 태고정 등 정자를 짓고 시회를 열며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공원개념이 생소하던 일제 강점기에 이 곳을 유원지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가보 싶은 곳으로 개발했다.
특히 향토출신 영하감독 이규환 님이 이 곳의 사문진을 배경으로 명작 ‘임자 없는 나룻배’를 촬영하여 화원동산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엉뚱하게도 ‘잔뫼’로 알려지면서 배성(盃城)으로 한자화하고 근거도 없는 배성십경(盃城十景)이란 시문이 달성군이 발행한 군의 홍보 책자에까지 버젓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는 화원동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선조들이 읊었던 시를 찾아내 시비(詩碑)라도 하나 세워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화원동신의 옛 명성을 알리고 싶었다. 때마침 윗대가 일대에 살았던 달서구 대곡동 출신의 최오현 님이 옛 화원현의 인물과 연혁 등을 정리한 책 금성지(錦城誌)를 가지고 있어 그 책의 명승 조에서 ‘상화대십경’을 찾아냈다. 제목만 배성십경일 뿐 본문의 내용은 상화대십경과 대동소이했다. 그렇다면 배성십경이란 말이 왜 등장했을까? 그 원인은 성산의 우리 말 잣뫼에 있었다. 성(城)의 옛 말 ‘잣’이 ‘잔’으로 잘 못 알면서 이 말이 와전되어 ‘술잔’이 되고, 더 확대되어 쟁반(盃)이 되면서 엉뚱한 배성(盃城)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검토과정을 거쳐 ‘얼 찾는 모임’이 감수하고, 대구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김영창)이 주체가 되어 동산의 한쪽 모퉁이 시민들이 잘 보이는 곳에 상화대십경(賞花臺十景)비를 새로 세웠다.
낙수귀범(洛水歸帆), 금호어적(琴湖漁笛), 연암낙안(淵巖落雁), 다산취연(茶山炊煙), 대평경가(大坪耕歌), 삼포추석(三浦秋色), 가야낙조(伽倻落照), 비슬숙운(琵瑟宿雲), 화대모춘(花臺暮春), 노강월주(老江月柱) 즉 낙동강으로 돌아오는 배, 금호강에서 들여오는 어부들의 피리 소리, 연암에 앉은 기러기, 다산마을의 저녁연기, 넓은 대평들의 풍년가, 삼포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 가야산 의 낙조, 비슬산에 머무는 구름, 상화대의 늦은 봄 경치, 강물에 비춰진 달그림자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비면이 좁아 20세기 초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 곳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며 만년(晩年)을 보낸 임재 서찬규(1825~1905)님의 시 ‘주유낙강상화대(舟遊洛江賞花臺),를 게재하지 못한 점이다.
(同舟泛夜月烟水浩湯湯), 같은 배로 달밤에 뜨고 보니 안개 피는 강물은 넘실넘실 넓구나, (逝者夫如斯萬折必東洋), 흘러가는 것들은 무릇 이와 같아서 만 구비 꺾인대도 동쪽 바다에 이르는 법, (湖山猶古今風物孰主張), 호수와 산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이 경관 누가 주재했으랴, (伊洛接泗洙寤寐寓羹墻), 이락 과 사수 인접해 있어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다네, (前修遊賞地千載姓名香)선현께서 놀이하고 감상하던 곳 천년토록 그 이름 향기롭구나, (媿我無勤力心田日就荒), 부끄럽도다! 나에겐 부지런함이 없어, 마음 밭은 날마다 거칠어 가네, (賴有良朋在皓首共相將), 다행히 좋은 벗이 있어, 흰머리 되도록 함께 도왔네,芷蘭暎芳洲1)採採不盈筐), 지란이 향기로운 섬에서 반짝이기에 캐고 캐지만 광주리에 차지는 않네, (悵望何所思美人天一方), 쓸쓸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하는가, 미인께서는 하늘 저 쪽에 계시는 것을, (楚辭歌數闋悽悽空斷腸), 초사를 몇 곡절 마침에 슬프디 슬퍼서 애간장만 저미네, (江村鷄欲唱回棹復引觴), 강마을 닭이 울려 하기에 노를 돌리며 다시 술잔을 잡는다.
이락과 사수는 각기 대 성리학자 주자와 공자가 살던 곳이기도 하지만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라 할 수 있는 이천(伊川)살았던 낙재 서사원 선생과, 사수(泗水)에서 만년을 보낸 한강 정구 선생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회를 봐서 임재 선생의 시비도 세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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