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사액 400년을 맞는 도동서원

이정웅 2007. 1. 13. 16:28
 

 

 도동서원 수월루

 도동서원 중정당(강당)

 도동서원 환주문

 


국채보상운동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각 언론 매체들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일이자, 대구의 자랑거리인 이 운동을 재조명하려는 반가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20세기 초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일부 애국시민들이 의병을 일으키거나 목숨마저 버리며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집요한 침략 행위를 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지역의 서상돈 등 선각자들이 2,000만 겨레가 담배를 끊는 돈을 모아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자고 전국 최초로 평화적이자 실용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한 것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대구의 경사는 국채보상운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오현의 수현(首賢)이자,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한국 성리학의 맥을 이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선생을 기리는 도동서원이 사액을 받은 4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한훤당 선생은 1454년(단종 2년) 서울에서 태어나 외가인 현풍에서 생활면서 함양군수와 선산부사로 있던 김종직 선생에게 김일손, 정여창 등과 함께 학문을 배운 분이다.

사마시에 합격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책무를 수행하던 중 유자광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희천·순천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사약을 받고 1504년 (연산군 10)돌아가셨다. 그는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하면서 선비는 무릇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나랏일에 종사하는 관료나 선비들은 시나 문장 짓기를 좋아하기보다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와 세상살이의 이치가 담긴 경학(經學)을 공부를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후 조광조나 김안국 등에 의하여 이러한 선생의 학풍이 이어지면서 사실 오늘날 유치원 교재정도에 불과한 소학(小學)이 사림의 필독서(必讀書)가 되면서 조선 지배계급의 정치이념이 되었다.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 맨 처음 세워진 것은 1568년(선조 1)현풍의 쌍계리였다. 정유재란 시 불타자 외증손 한강 정구(鄭逑1543~1620)선생이 중건을 진행하면서 아버님의 유택이 있던 구지 보로동으로 옮기게 된다. 1607년(선조 40)다시 나라에 사액을 청하니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사립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서원은 지방의 인재를 길러내고 문풍을 진작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장점도 있으나, 당쟁의 원인이 된 파당을 만들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행정수행을 방해하기도 하였으며, 탈세의 온상이 되는 등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보다 못한 대원군은 많은 선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600여 개의 서원 중 국가적으로 존경받을 인물을 모셨거나 아니면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서원에 모셔진 경우는 한 서원만 남기고 폐쇄시켜 결국 남은 것은 전국적으로 47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동서원의 재건을 주도했던 거유 한강이 추가로 배향된 도동서원은 훼철되지 않았다.

사액을 받은 지 4세기를 맞는 도동서원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석가래 몇 개를 보수한 일 외 아직도 건축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흙담이 보물(제350호)로 지정된 특이한 곳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성리학을 공부하든, 건축학을 공부하든, 조경학을 공부하든 반드시 둘러보고 배워야 할 곳이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의 내삼문, 잉카인들의 돌쌓기와 흡사한 견고하게 쌓은 중정당 석축, 아름다운 장식의 용두석, 집안으로 들어 올 때 머리를 숙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환주문을 비롯하여 서원전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단을 지은 입구 등은 보는 사람을 매료시킨다. 

서원을 보듬고 있는 산 이름은 원래 대니산(代尼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께서 공자의 별명인 중니(仲尼)의 니(尼)는 그대로 살리고 대신할 대(代)를 일 대(戴)로 고쳐 ‘공자를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로 대니산(戴尼山)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자랑스러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