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의병장 곽재우 선생과 현고수

이정웅 2007. 1. 8. 22:22

 수령 550년의 현고수

 북을 걸었것으로 짐작되는 가지

  현고수 옆에서 의병활동을 논의하는 장면(충익사)

 봉분이 낮은 망우당 묘소(달성군 구지)

 충익사(의령읍)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라는 작은 마을 한 복판에는 현고수(懸鼓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7호))라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수목도감에도 없는 나무이름이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관상용이나 조림용으로 들어온 나무도 아니다. 잎이 늘 푸른 상록수냐 하면 그것도 아니요, 바늘 같이 생긴 침엽수냐 하면 그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나무라는 말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걸 현(懸), 북고(鼓), 나무 수(樹)이니 사물놀이의 한 종류인 북을 건 나무라는 뜻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빨래 줄도 아니고 나무에 북을 걸었다니 도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역사는 400여 년 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592년(선조 25) 4월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치려하니 길을 빌려달라며 20만 대군을 보내 부산포에 상륙하니 드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 일이 외진 산골 세간리에 살고 있는 곽재우(郭再祐,1552~1617)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10여일이 후였다. 집일을 돕던 노비 몇 명으로서는 그들과 대항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느티나무에 북을 걸고 두드려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끈 후 나라가 위급에 처함을 알리고 기꺼이 목숨을 바쳐 나설 것을 강조하여 의병을 모은 것이다. 현고수는 그 때 북을 건 나무를 말한다. 당시 1년생이라고 해도 무려 416년생이니 적어도 500년 정도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과 함께 7년이라는 장기전이었다는 점에서도 특이 하지만 정규군과 달리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신분인 의병들 적극적으로 참여해 승리로 이끈 전쟁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창의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이었다. 야망에 가득 차 있던 젊은이들이 다 그러했듯이 그 역시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살 과거에 응시 2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답안의 내용이 선조의 뜻에 거슬려 합격이 취소되자 청운의 꿈을 접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 기강에 정자를 짓고 평생을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나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를 그만 두지 않았다. 왜군이 부산포를 점령했다는 비보를 들은 불과 1주일만인 4월 22일 싸움터에 나가니 전국 최초의 창의다. 지리에 밝은 점을 잘 활용하여 때로는 유격전으로 때로는 위장술로 작전을 펼쳐 함안, 창녕, 영산, 의령, 현풍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 때 도망친 순찰사 김수의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일도 있었으나 그의 눈부신 활약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선산도호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 많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일면 무능한 정부군 지휘관의 작전지시에 따르기가 어렵고 일면은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이 못마땅해 벼슬이 주어저도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스스로는 불의를 참지 못하여 영창대군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리고는 낙향한다. 그 지루하던 전쟁이 끝난 1617년(광해군 9)그는 65세로 이승을 마감하니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유언에 따라 봉분도 없는 조촐한 유택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이듬해 구례마을에 그를 기리는 충현사(忠賢祠)가 세워지고, 1677년(숙종 3)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워낙 탁월한 분이라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만 참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의 나라사랑정신이다.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히 합격한 과거를 취소한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컸을 터인데도 나라가 위급하자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구국의 전선에 나섰다는 점과 관군 지휘부의 온갖 모함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라를 지킨 분이다. 그는 전투가 다소 소강상태였을 때에는 달성의 비슬산에 은거하였을 뿐 아니라, 장래를 대비해 대니산에 석문산성을 쌓았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더 하지만 아버지의 고향이자 한 때 전장이었던 대구도 그를 기리기 위해 대구의 관문 동촌 일대에, ‘망우당공원’이 조성하였다. 예연서원 앞에 있는 그의 신도비는 그의 나라사랑정신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지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하며 해방과 한국동란 때에 실제로 비에서 땀이 나는 것을 주민들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나 의령일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으나 마지막은 대구 땅에  묻혔다. 

아내와 함께 현고수를 찾아간 날은 늦가을 이었다. 대구의 많은 느티나무들이 이미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 채비를 하고 있어 내심 불안했다. 왜냐하면 의령은 대구보다 더 남쪽인 만큼 가을이 더 빨리 찾아와 잎이 다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현고수의 참모습을 볼 수 없지 않을까 하여 가슴을 졸였으나 다행히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단풍이 노랗게 들어 더 고풍스러워 보였다. 뒤는 산이요 앞은 내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세간리 마을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이 외딴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발상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현고수는 가을 햇볕을 벋어 더욱 빛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북을 달았음직한 가지는 쇠로 된 버팀목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부러질 만큼 쇠퇴해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선생의 생가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발길을 돌려 오랜만의 단출한 여행을 더 즐기기 위해 의령까지 가기로 했다. 도중에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님의 생가에도 들렸다. 우리 부부 말고도 관람객이 많았다. 생각보다 한옥의 규모가 크고 고풍스러운 것으로 보아 선대도 지역의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 같다. 그런 그 분이 대구에서 국수공장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재벌로 성장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집을 안내하거나 관리하는 분이 없어 가게나 선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점과 삼성의 조직과 잘 훈련된 인재를 통해 충분히 가능한 창업자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간단한 프로필이 적힌 유인물조차 비치해 놓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읍내에 도착해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충익사에 들려 유물전시관과 잘 가꾸어진 경내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