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서당
왕버들
척사정
수산 선생으로부터 재직 시 같이 활동했던 퇴직 문우(文友)들의 모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다. 이전에 소연 선생님으로부터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모 대학교에 계약직으로 재취업하여 근무하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사택을 주어 시내와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선뜻 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계약이 만료되어 운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해보자고 하여 사람을 모았다.
그 결과 이미 제안한 두 분과 나, 이외 최중수, 유재희, 배연자 님이 동참하여 모두 6명으로 모임을 발족할 수 있었다. 첫 모임이 있던 날 오랜만에 만난 기쁨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매달 모임을 갖되 한달은 시내에서, 한달은 문학관이나 고적답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데 회(會)의 명칭을 선뜻 결정할 수 없어 다음 회의로 미루었다. 두 번째 모임 때 송연님이 ‘오류문학회(五柳文學會)’로 하자며 문화예술회관장을 지냈던 홍종흠님이 추천해 준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다섯 버드나무를 일컫는 오류(五柳)란 도연명이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자신을 모델로 쓴 ‘오류선생전’에서 따 온 것이라고 했다. 회원 모두가 비록 미관말직을 맡았다 하드라도 벼슬을 했고 정년이나 명예퇴직을 했다 하드라도 현직에서 물러난 그러면서도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현령(縣令)으로 공직을 마감한 도연명과 이미지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란 것이다. 우리들은 그 깊은 의미에 감탄하며 회명(會名)으로 확정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도연명이 지은 ‘오류선생전’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이 없어 집 옆에 서 있는 오류(五柳)를 보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늘 말없이 조용히 살았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그 뜻을 깊이 해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지만 돈이 없어 늘 마시지는 못했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그것을 알고 술을 마련하여 선생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선생은 한달음에 달려가 술을 모두 마셔버리고 취하면 크게 만족하였다. 결코 주정을 부리는 일 없이 취하면 금방 돌아갔다. 사는 집은 너무 초라하여 비바람을 다 막지 못할 정도였다. 선생은 허름한 옷을 입고 굶기를 밥 먹듯 하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늘 시와 문장을 지어 홀로 즐기면서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선생은 세상의 이해득실을 모두 잊고 혼자 쓸쓸히 죽어갔다.
는 것이 오류선생전의 줄거리다.
모임이 결성된 후 첫 답사는 조지훈과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영양이었다. 주실과 두들마을을 둘러본 것도 기억에 남지만 특히 음식 디미방의 저자이자 퇴계학파의 거유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을 길러낸 정부인 안동장씨의 기념관을 볼 수 있는 행운도 가졌다.
두 번째 답사는 군위의 전통마을 한밤과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로 정했다. 공교롭게도 홍종흠님도 함께했다. 그 분의 윗대이자 오류문학회 제명(題名)의 계기가 된 부림 홍씨의 중시조 홍노(洪魯, 1366~1392)선생이 낙향하여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살던 곳에 세운 양산서당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척사정이란 정자도 안내를 받았다.
나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답사를 떠나는 아침까지 내내 흥분되었다. 절의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고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가 살든 곳이 어떤 곳일까 하는 관심도 컸지만 그보다도 오류의 버드나무가 어떤 종(種)일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버드나무라고 하지만 버드나무과에는 수십 종의 버드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미루나무나 이태리포플러는 서양에서 도입된 품종인 만큼 도연명 시대에 있던 나무가 아니고, 능수버들은 모양이 좋으나, 수명이 짧고, 갯버들은 키가 작아 선비들이 사랑하기에는 부적합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티재에서 넘어 도착한 곳은 제2석굴암 바로 옆이었다. 최근에 보수한 흔적이 뚜렷한 양산서당 옆에 왕버들 노거수가 초겨울 잎을 다 떨어트리고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아 그렇구나. 도연명이 심었다는 버드나무가 바로 왕버들이구나! 하면서도 그 웅장한 자태에 기가 질렸다.
홍 관장께서 절을 무분별하게 확장하면서 주변의 경관이 많이 망가졌다고 하나 그래도 아직은 고즈넉했다.
양산서당은 1786년(정조 10) 고려조의 충신 홍노, 조선조 양관 대제학을 지낸 홍귀달, 대제학을 역임한 홍언충을 모시는 서원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고종 때 시행된 서원철폐령으로 강당만 남고 없어진 것을 1897년 중수하고 1989년 새로 지어 양산서당으로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서당 내에는 홍노 선생의 실기와 조선 후기 홍여하 선생이 지은 휘찬여사(彙纂麗史,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목은 이색선생이 ‘득지(홍노의 자)의 문장은 콩과 쌀 같이 이로운 문장이다’라고 칭찬했다는 홍노 선생은 여말(麗末) 25세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온몸으로 버텼으나, 스승인 정몽주가 피살되는 등 젊은 그로서는 한계를 느껴 마침내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은둔하였으나 울분에 쌓여 병이되어 그런지 27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심은 버드나무는 찬바람이 부는 이 겨울날에도 그의 절의처럼 꿋꿋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다.
홍노 선생이 거닐며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던 유지에 중국 은나라의 백의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든 옛일에 견주어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었도다. 라는 척피서산혜, (陟彼西山兮),채기미의(採其薇矣)라는 글에서 따와 후손들이 척서정(陟西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선생은 정중음(靜中吟) 즉 ‘고요한 가운데 읊조리다’란 시에서 ‘버드나무에 해 비쳐 바람 살랑이고(楊柳光風細), 연못에 흐르는 물 잔잔하도다(方塘活水悎),이런 무한한 자연의 진리를 (一般無限趣), 애오라지 이 가운데서 보노라(聊向此中占) 라고 자신의 심경과 자연을 노래했다.
이러한 아름다운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오래 살았다면 대문장가나 학자로 한국유학사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나 아깝게도 요절하셨다. 충신 홍노 선생의 유지를 살펴보고 무엇보다 오류가 왕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기쁨은 오래 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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