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2001년이었다. 전남 장성으로 출장 갈 기회가 있었다. 88 고속도로를 타면 곧바로 오겠지만 모처럼의 나들이이고 또한 비가 와서 당분간은 산불 걱정도 없을 것 같아 경남 하동으로 향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성급한 매화가 피고 푸른 섬진강과 하얀 모래톱,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들이 전 국토가 공원이라는 어느 국토 예찬론자의 말을 실감하게 했다.
하동 포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얼이 배어 있는 산청에 들어섰다.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탄생 500주년을 맞는 그를 만나기 위해 덕천서원(德川書院)을 가기로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들어 포기하고 단속사지(斷俗寺址)로 향했다. 아우 만농(晩儂)으로부터 정당매(政堂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별러 왔던 곳이다. 아우는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인맥에 관심이 많아 향토사를 연구하는 나에게 많은 정보를 주는데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단속사지의 정당매를 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고 하니 “나무를 좋아하는 형께서 어찌 그곳을 가 보지 않았느냐”고 했었기 때문이다.
정당매는 선초(鮮初) 시, 글씨, 그림에 능한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이 직접 화초를 기르면서 체험한 지식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園藝) 이론서 『양화소록』에 등장하는 나무다. 그는 “매화” 편에서
우리 선조 통정[通亭,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을 말함]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때 절 마당 앞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천지의 기운이 돌아가고 또 오니 / 하늘의 뜻을 납전매(臘前梅, 세한에 피는 매화)에서 보는 구나. / 바로 큰 솥 가득 맛있는 국을 끓이는 데 / 하염없이 산속을 향해 졌다가 또 피는 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조정에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분간하여 바로잡고 조화로써 서로 돕고 구제한 일이 매우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시참(詩讖, 시를 쓴 것이 뒷날 뜻밖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속사의 스님이 공의 덕과 재주를 사랑하며,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매년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매화의 품성에 따라 재배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전해져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른다. 그 가지와 줄기는 굽어져 온갖 모양을 이루고 또한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으니 ‘매보’에서 말하는 고매(古梅)와 차이가 없다. 이것이 진정 영남의 고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로부터 왕의 명령을 받들어 영남으로 가는 사대부(士大夫)는 이 고을에 이르면 모두 절을 찾아 매화를 둘러보고서 운(韻)을 빌려 시를 지어 처마 밑에 걸어 두었다‘. 라고 했다.
조부(祖父) 통정이 고려 말에 심었다는 것과 조선 초에 이미 영남의 명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당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이자 심은 이가 분명한 다시 말해서 족보가 뚜렷한 매화이다.
매화는 난, 국화, 대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일찍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다.
단속사는 5세기 전에 이미 폐사가 되어 대웅전 앞에 있었을 두 3층 석탑(보물 제72호와 73호)만 없었다면 거기가 신라의 천재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고, 통정이 젊은 시절 학문을 연마했다는 단속사 터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문제의 정당매는 보이지 않았다. 동행한 김종학님이 빨리 오라기에 가 보니 골목 안, 마을 한복판에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가슴이 달아올랐다. 가장 오래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강회백(姜淮伯)이 심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이론서에 기록된 매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감격 때문이었다. 울타리를 설치해 놓아 보호에 정성을 다하고 있으나 워낙 늙은 매화라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행한 동료 김장길님에게 가지를 끊게 하여 대구와 가져와 평소 알고 지내던 매화 전문가인 정옥님 여사에게 접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삽수(揷穗)로 적당치 않고 접붙일 시기도 지나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이듬해 접을 붙여 3그루를 생산했다.
그중에서 2그루를 가져와 1그루는 대구수목원 입구 화목원에, 다른 1그루는 산림문화전시관 남쪽에 심었다. 그해가 2003년 3월 2일이었다. 그 후 수목원을 갈 때마다 그곳을 들러 잘 자라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나무가 크기 시작하자 입구에 심은 것은 다른 나무에 가려져, 전시관 남쪽의 것 역시 다른 나무에 가려져 생육이 나쁠 뿐 아니라, 주변에 심은 이대가 번져 뿌리 발육이 왕성한 그로 인해 멀지 않아 도태(淘汰)될 것 같았다.
따라서 전시관 남쪽의 정당매는 포기하고 입구의 것만이라도 보전하고 싶었다. 모 계장에게 주변의 나무를 옮겨 생육공간을 충분히 확보해 주든지 아니면 넓은 곳으로 이식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후 몇 차례 수목원을 가 보았으나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가슴 아팠다.
수목원이 대구의 명소로 자리 잡고 그곳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지난날 힘들게 조성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의 부탁임에도 외면당한 것 같아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2015년 남정문 소장이 취임했다. 축하 인사도 할 겸 나무 구경도 할 겸 수목원을 찾았더니 전시관 남쪽의 것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주변의 이대를 말끔히 제거해 자라는 환경을 크게 개선했다(현재는 포석정 부근으로 이식). 오래전 정당매를 보러 갔을 때 부인과 동행한 일이 있어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왕이면 입구의 정당매도 건사 해 줄 것을 부탁했더니 그해 가을 잔디광장 남쪽으로 옮기 겼다고 했다. 2016년 3월 찾았더니 안내판도 고급스럽게 만들어 놓고 수형을 다듬었는데 몇 개의 가지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2014년 정당매가 마침내 고사했다는 보도(경남매일, 2014, 2, 20)가 있었다. 귀중한 생명 문화유산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조차도 사라지게 되었으나 다행히 대구수목원에 그 분신이 남아있다. 귀중한 나무를 보존했다는 기쁨이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몇 년이 지난 2021년 3월 5일 탐매를 즐기려는 동료들과 함께 정당매는 물론 하즙(河湒)과 조식이 심은 원정매, 남명매 이른바 “산천 3매”를 구경하려 나섰다. 초미의 관심은 정당매의 고사(枯死) 여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어! 현장에 도착하니 죽었다는 보도와 달리 꽃이 활짝 피었고 그 옆에 2013년 삽수를 채취해 2014년 3월, 20일 새로 심었다는 합천군수의 표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후계목을 보존한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자긍심이 무너지는 것 같아 시원섭섭했다. 덧붙이면 원정, 남명매 등 산청 3매를 대량 생산하여 불과 100여 년 전 조성한 이웃 고을 광양의 매화 축제에 관광객으로 섬진강 일대 교통이 마비되는 성과를 벤치마킹하여 관광 자원화하기를 산청군수에게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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